이왕가 사람들

의친왕, 소위 황실 후손,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훔치다

자불어 2024. 6. 16.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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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의친왕의 한 후손이 의친왕의 독립활동을 열거하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의친왕이 도산 안창호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지시"

그리고 대한제국 고종의 후손 단체 홈페이지에는 의친왕이 1902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써달라”며 금일봉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을 타고 여과 없이 전파되면서 진짜 사실인냥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이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공립협회를 의친왕이 설립했다고?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하와이에 정착했던 교민 다수가 이 무렵 미국 본토로 생활 터전을 옮기고 있었다. 이에 1904년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에서 새로 이주해 온 동포의 자립을 위해 일부 교민이 ‘공립협회’를 세웠다. 안창호는 기존 조직을 모태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위한 단체로 발전시켰다. 공립협회는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공립관을 설치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을 지지하는 한편 1908년에는 다른 한인단체인 대동보국회와 함께 친일 미국 언론인 스티븐슨을 암살했다.

진짜 독립운동가는 李堈(이강) 아닌 李剛(이강)

여기에 의친왕 이강(李堈)은 없었다. 단 독립운동가 이강(李剛, 1874~1964)이 계셨다. 이강 선생은 1902년 미주개발회사에서 모집한 이민에 합류, 하와이에서 1년간 영어를 배우고 샌프란시코로 건너갔다. 그는 안창호, 정재관 등과 함께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1905년 11월 공립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스티븐슨을 암살한 전명운 열사와 함께 했던 이도 바로 이분이다. 안중근 의사 의거 이후에는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북경으로 건너가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출범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는 등 해방 전까지 독립을 위해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현재는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이강 선생(한국학중앙연구원), 이강 선생과 그 가족

이때 의친왕은?

이강 선생이 공립협회를 세울 무렵, 그러면 당시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은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의화군은 1900년 8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00~1901년 워싱턴 한국공사관에 머물렀으며 1901년 3월 7일 버지니아 세일럼으로 내려왔다. 1902년까지 그곳에서 로녹 컬리지를 다니다가 이해 9월 오하이오로 옮겼다. (이때 안창호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다고 주장하나 이땐 캘리포니아에 있지도 않았다.) 로녹에서 남녀공학인 웨슬리언으로 옮기면서 의친왕은 두각을 드러낸다. 1903년 1월 한 목사의 18세 따님과 사랑에 빠지고 1903년 4월에는 델라웨어 모자상점 점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904년에는 오하이오의 한 여고생과 약혼 소문까지 퍼졌다. 이런 그의 여성편력이 뭐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 1903년에는 한 농부의 여친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폭행을 당하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같은 해 11월 오하이오를 떠나 워싱턴으로 옮겼다. 의화군은 사고뭉치였다. 워싱턴과 뉴욕을 오가며 돈을 펑펑써서 한 미국 은행으로부터 피소되기도 했다. 1905년 2월 미국에서 일본으로 잠시 왔다 국내 사정으로 3월 17일 다시 미국으로 갔다. 이때 고종은 스티븐슨의 친지에게 의친왕의 감독을 의뢰했다. 바로 그 스티븐슨이다. 

이강과 웨슬리언대학

계속되는 거짓말

의친왕의 행동반경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버지니아, 오하이오였다. 또한 고종은 의친왕을 스티븐슨의 친지에게 맡겼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자신을 부탁한 스티븐슨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의친왕과 스티븐슨의 관계는 그게 전부다. 거짓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실 후손 홈페이지와 그 사람은 의친왕이 해방 후 한국독립당 고문 겸 최고위원을 역임했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서도 의친왕이 한국독립당 고문 겸 최고위원을 역임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활동 역시 이 역시 이강(李剛) 선생이지 의친왕 이강(李堈)이 아니다. 이승만이 구 황실을 탄압했기에, 김구 편에 자리매김하려 꾸며낸, 또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덧붙인 헛소리다. 툭하면 "고종이 지시했네, 의친왕이 지시했네, 근데 독립운동 특성상 증거가 없네" 하지만, 증거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 한 일이 없는 거다. 망국 황실의 허물을 꺼내면 "식민사학, 일제의 프레임' 운운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니 그게 마치 사실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무슨 "역사 바로세우기"를 한다고 하는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더니, 이제 그 후손은 타인의 독립운동 공적을 가로채 제 조상 분칠하는 데 쓴다. 어쩌면 이것이 대한제국 황실 본모습이 아닐까. 일제의 은사금 받아 호의호식할 때(어느 후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일제강점기 프랑스제 인형을 갖고 놀았다며 자랑했다. / 자세히 보면 생활형편은 해방 전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국외에서 목숨을 걸고 피땀 흘렸던 독립지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그저 우리말로 이름이 같아 같은 사람인 줄 착각했다면 무지한 거고, 위에 열거한 정보가운데 일부라도 알았다면 사악한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의친왕의 숭배자들은 더는 없는 독립운동서훈 조작할 생각 말고 진짜 평생을 독립운동에 힘쓴 이강 선생 같은 분들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마음 속 깊이 존경하기를 바란다. 

*제 글에 대한 비판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페북이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여러 잘못된 정보들은 모두 캡처해 두었으니 사과나 반성 없이 슬그머니 지우지 말았음 좋겠네요.
이강 선생의 사적은 다음 기록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의친왕 독립운동 운운 글을 보시게 되걸랑,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78년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산남면(山南面) 의방리(義方里, 현 봉산면 의산리)에서 아버지 이병훈(李秉勳)과 어머니 박성심(朴誠心)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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