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일제강점기의 "의(친)왕" 호칭 사용
자불어
2024. 8. 1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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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황실 아래로 편입되었다. 고종은 이태왕을, 순종은 이왕을, 그리고 이하 일가는 대한제국 황제의 친족관계, 구 지위에 따라 공 이하 작위를 받았다. 의친왕은 여러 서예 작품을 남기며 말미 관지에 "춘암 이강", "이강공", "의왕 이강" 등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이중 "의왕"은 대한제국 시대의 봉작이었던 만큼, 더러 그 자체로 항일이나 저항, 또는 대한제국의 회복 등의 의미가 담겼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효덕전의 망제, 이왕 전하 어친행, 의친왕 전하께도
지난 24일은 음력으로 2월 15일이며 또한 고종 태황제의 부묘 길일은 음력으로 21일임으로 별다례別茶禮는 다시 받들지 못하시겠음으로 작일 오전 11시에 창덕궁 효덕전孝德殿에는 고례에 의한 성대한 망제望祭가 계셨는데 이왕 전하의 친행으로 이강공 전하와 친척이며 각 귀족과 이왕직 고등관 다수가 참배하셨더라.(매일신보 1921.3.25.)
흔한 예는 아니지만, 위 기사 본문에는 "이강공"이라고 썼지만 타이틀에는 "의친왕"이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 이 기관지에서도 "의친왕"이라고 쓴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는 "공"이지만 맥락에 따라 "의친왕"이라고 써도 하등 문제는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의왕", "의친왕" 등의 표현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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