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마지막 왕녀” 이해경의 오류, 1902년 의친왕은 안창호를 만날 수 없었다.

자불어 2024. 8. 20. 12:58
728x90

#마지막왕녀 #이혜경 #의친왕 #역사왜곡 #안창호 #공립협회 #독립운동

"마지막 왕녀" 이해경 여사는 의친왕의 딸(5녀)로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사서로 근무할 때 부친 이강 공의 독립운동 기록을 발견하고, 이후로 계속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국내에서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란 저서를 출간해 그 일부를 소개한 바 있다. 지난 광복절(2024.8.15.) 뉴욕 한인회는 여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했고, 또 이를 계기로 여사가 발굴한 의친왕의 행적이 다시 언론 지면에 회자되고 있다. 그중 하루 앞두고 작성된 미주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미국 유학길에서 시작된 김규식, 안창호와의 인연
1877년 고종이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버지니아 로아노크대학에 다녔다.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을 만났다. 1902년에는 LA를 방문해 김규식을 통해 알게 된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위해 써달라”며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미주 중앙일보 2024.8.14.)

https://news.koreadaily.com/2024/08/13/society/generalsociety/20240813211748596.html(24.8.20. 12:00 검색)

몰락한 왕조의 후손이 선친의 독립운동 기록을 발굴한다는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하다. 그런 까닭에 연구 결과는 자연스레 신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연구는 가족 밖을 벗어났을 때는 엄정한 검증을 요한다. 지난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학술행사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이준 회장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리고 나무위키 등에도 여과나 검증 없이 그대로 실려 사실인냥 전파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해경 여사가 언급한 안창호와 의친왕의 관계를 실증해 보겠다. 

이준,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가운데(세종특별자치시 행사 자료집 p.17.)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안창호의 여권[執照]이 있다. 이 여권에 따르면 안창호는 1902년 8월 23일 미국총영사관에서 입국 사증을 받고 9월에 출발, 일본, 캐나다 뱅쿠버를 거쳐 10월 7일 미국령을 통과,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안창호의 첫 입국 기록이다. [김도형. (2015). 도산 안창호의 ‘여행권’을 통해 본 독립운동 행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pp. 37-68. 참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공립소학교를 다니고 1903년 9월 한인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는 1904년 3월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기 전까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렀다. [김용달. (2008). 도산의 무실역행론과 미주 한인의 생활윤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1, p.5. 참조]


의친왕이 L.A.를 방문해 안창호에게 금일봉을 주었다던 1902년, 안창호는 L.A.에 없었다. 

한편 버지니아 주 세일럼에서 로녹 대학을 다니던 의친왕은 1902년 9월 13일 오하이오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이곳의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의친왕이 1902년 안창호를 만났다면 10월 중순 ~ 12월밖에 없다. 입학 수속 등을 고려할 때, 1902년 10월 이후 의친왕이 갑자기 L.A.에 등장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안창호도 L.A.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1월 델라웨어 지역 신문에서는 의친왕과 웨슬리언 대학 여학생과의 염문 보도가 있었다. [정병준. (2023). 김규식과 의친왕: 미국 유학시절을 중심으로. 사학연구,(152), pp. 186-187 참조.]

이는 1902년 9월 이후 의친왕이 한동안 델라웨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마 10월 중순 이후 L.A.에 있었다면 저런 가십 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친왕은 1902년 버지니아에서 오하이오로 전학갔다. 즉, L.A.에 갈 수 없었다. 

이해경 여사의 삶, 열정은 감동적이지만 그녀가 언급한 정보는 사실이 아니다. 조상의 현창을 위해 이말 저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와 공공의 역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잘못된 사실이 역사인냥 둔갑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런 착오는 도산 안창호는 물론 의친왕에게도 누가 되는 것이다. 후손들의 역사 만들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실례로 여기에 기록한다.

1902년 의친왕이 안창호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왜곡이다. 

일제강점기 감시대상 인물 카드(안창호, 1932년 7월 4일 경기도 형사과에서 촬영)-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 견해에 이의나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빛바랜 역사책에서 아버지의 항일운동 기록 발견”

제79주년 광복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에 위치한 한 아파트. 이곳에는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함성이 귀에 생생하다는 한 한인이 살고 있다. ...

news.koreadaily.com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