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성균관 석전대제에 참석한 조선총독

자불어 2024. 10. 1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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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조선 500년의 통치 이념이었으나 유학의 여러 덕목은 식민통치자들에게도 유효했다. 충성의 대상, 즉 임금만 바꾸면 이보다 좋은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유학은 사무라이의 교양이기도 했기에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1915년 3월 17일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수하를 이끌고 석전대제 참석했다. 이하는 그 신문기사다. 

매일신보 1915.3.18. 2면(국립중앙도서관 신문아카이브) (좌) 석전대제 광경 / (중) 초헌관 박제순 / (우) 데라우치 총독

석전 거행, 데라우치 총독 참배
2월 1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경학원經學院에서 춘기 문묘文廟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즉 중춘仲春의 상정일上丁日이라. 융융한 화기는 반궁泮宮에 가득하고 생기가 그치지 않는 춘풍은 묘정에 불어와 명륜당明倫堂 앞의 화훼교목에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나타나니 혼연한 덕기德氣가 초목에 미치는 듯하더라. 당일은 고모예복高帽禮服으로 인력거(腕車)를 타고 오는 진신縉紳도 있고 아관박대峩冠博帶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유생도 있어 경학원으로 향하는 사람이 오전 8시부터 전석현磚石峴에 끊임 없이 어어져(絡繹不絶) 있는데 각도各道 강사講士 제씨는 이른 아침부터 회집會集하여 명륜당 우측 큰 방(廣間)에서 정각을 기다리고 사성司成 박치상朴稚祥 씨는 현관제복玄冠祭服으로 계단 앞에 정립하여 내객을 맞이하더니 잠시 뒤 부제학 이용직李容稙 자(작), 박제빈朴齊斌 남(작)이 인력거로 도착하고 이어서 대제학大提學 박제순朴齊純 자(작)도 자동차를 타고 당도하여 남작 박기양 씨와 자작 권중현 씨, 기타 다수 유생이 계속 모여들고 세키야(關屋) 학무국장도 참석하였더라. 대제학 이하 제관 제씨는 명륜당 우측 큰방(廣間)에서 예복으로 갈아 입고 시간의 도래를 기다리며 묘사廟司의 진설이 끝나더니 잠시 뒤 둥둥(鼕鼕) 수 차례 북소리가 10시를 알리자 악공무장樂工舞匠이 홍포현모로 각각 자리에 임하고 이어서 경성고등보통학교와 보성학교 이하 여러 학교의 학생과 기타 참배자가 대성전 광장에 나란히 서자 이어서 유건도포儒巾道袍의 청주淸酒한 집사와 사모각대紗帽角帶의 정숙한 강사, 현관제복玄冠祭服의 엄연한 제관이 각각 순차에 따라 각기 자리로 나가니 패옥이 쟁쟁 錚錚하며 의관이 제제濟濟한 것이 실로 장엄한 기상이 전 내에 충만하다. 이어서 대축大祝이 자리로 나가니 그 다음은 응당 의안지락疑安之樂과 열문지무烈文之舞가 있어야 하나 금년은 양암諒闇(국상) 중이므로 무악은 진설에 그치고 다만 정숙경근靜肅敬謹하는 태도로써 성의만 표한다. 헌관 이하 유생이 사배四拜를 마치고 참배하는 학교 직원 이하 제학생이 탈모 경례하여 참신參神하는 예가 끝나자 초헌관 박제순 자(작)는 전에 올라 분향궤좌하고 폐비幣篚를 신전에 전奠하야 전폐례奠幣禮를 행하고 이어서 이용직 자(작)는 아헌례亞獻禮를 행하며 박제빈 남(작)의 종헌례終獻禮와 분헌관分獻官 이인직씨와 박치상씨의 동서종봉향위東西從奉享位의 분향헌작焚香獻爵이 끝나자 석전지례는 이로써 대강을 고필하였다 하겠더라. 다음으로는 명륜당 우측 큰방(廣間)에서 휴식 중이던 데라우치 총독은 다치바나 총장, 오후지(大藤) 무관, 후지나미(藤波) 통역관등을 데리고 들어와 신전에 분향하고 국궁배례하여 경의를 표하고 박기양朴箕陽 남(작), 권중현權重顯 자(작) 이하 제씨도 차례로 첨향례 添香禮를 행하고 예가 마침에 헌관 이하 제인이 사배하여 사신례辭神禮를 행하고 일반 참배자와 학생 등도 탈모 경례하니 석전지례는 이로써 마쳤다. 그리고 총독 이하 제관 및 일반 참배인이 차례로 문을 나섰다. 당일의 제례는 극히 장엄하여 참배자로 하여금 자연히 숙연계구肅然戒懼하게 하며 전 내의 향연香煙은 신전에 전결篆結하여 서기瑞氣가 퍼지고 황황한 촛불(촉광)과 낭낭한 독홀성은 목목穆穆한 기상이 충일充溢하며 정전에 성기하는 두 개의 횃불과 연기(炬煙)는 전상에 피어오르며(靉靆) 채운彩雲으로 가득 차니 동원同院(경학원)의 제례는 가히 그 경례敬禮를 다했다 하겠더라. 제례를 마치니 때는 오전 11시라. 데라우치 총독이 가장 먼저 자리를 뜨고 이어서 수백 인의 다수한 참배자도 동원을 나서더라.(매일신보 1915.3.18. 2면)

데라우치는 이날 일기에 "10시 경학원 참교의 일"이라고 간단히 적었다. 그리고 다음날(3.18.) 오후 경학원 여러 사람과 이완용을 초대해 다과를 대접했다. 조선 500년의 이념은 이리도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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