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도, 사동궁도 팔아먹은 의친왕 이강의 실체
대한제국이 멸망한 건 암군이자 혼군 고종의 역할이 컸다. 순종은 최근 동상 에피소드만큼도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친왕 이강에게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방자도, 더 앞서 윤치호도 지적했듯, 돈씀씀이 헤프고 축첩질엔 당대 으뜸으로 방종하게 살았다. 그의 아이 낳은 여성이 몇 명, 또 간간히 기사에 나오는 애첩 몇 명. 하지만 정실부인에갠 아이가 없었다는. 그럼에도 상해 망명 기도 사건 탓에 그나마 다른 황실가 사람들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
월경 직전에 붙잡히자 그는 억지로 끌려온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구사했다. 그의 진술 조서가 남아있는데, 그는 모든 문제를 전협 이하 대동단원의 탓으로 돌렸다. 팔아먹은 거다. 일제의 조작이라고 하나 일제가 조작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심문조서를 뭐하러 조작하나. 의친왕이 뭐라고.(고무신 광고 갖고 백성들의 기대를? ㅋ. 천도교 잡지 개벽에도 그를 축첩쟁이라고 기술했다. 그건 존경이 아니라 돈 씀씀이 헤픈 댄디보이가 신는 신발이라하여 쓴 것에 불과하다.) 그의 망명을 주도했던 전협은 취조 과정에서 모진 고문으로 고통에 시달리다 병 보석으로 나와 끝내 얼마 못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일제의 감시하에 초라하게 치뤄졌다. 조선어 신문인 동아와 조선은 일제 치하였음에도 지사로서의 그의 삶에 애도를 표했다. 그때 이강은? 코빼기도 안 비쳤다.
2. 축첩과 온천 여행
이후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며 여기 저기 여행다녔다. 어떤 이들은 이강의 질펀한 생활을 독립운동을 숨기기 위해 그랬다고 하나 그러려고 그런 생활을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어떤 독립운동가가 축첩질에 산천유람 했던가. 그리고 일본에 끌려갔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유배 생활하며 벳푸 온천에 몸 담군 자 있던가?
3. 사동궁 땡처리
무엇보다 그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대목은, 광복이 되자 혹여 적산이라고 자기 저택 사동궁을 정부에 빼앗길까봐 잽싸게 처분한 사건이다. 물론 사기꾼에게 당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재판 걸었다가 제 스스로 취하함) 이승만에게 빼앗긴 게 아니다.-이승만 지지자들은 뭐하는 지 모르겠다. 하지도 않은 일에 이리 욕을 해대는데. 어떤 이들은 의친왕이 직접 팔아치웠음에도 그 사실은 슬쩍 지운 채 "몰수", "파괴", "복원"만 운운하는 데, 참 후안무치한 행동이라 하겠다. 혹여라도 사동궁이 복원되면 그 연혁에 꼭 빨간 글씨로 써야 한다. "이강, 광복 직후, 새 나라에 빼앗길까 두려워 잽싸게 팔아치우려다 사기 당하다."
그런 그를 독립운동가로 꾸며대는 자들이 있다. 그에게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는 건 그 망명 기도 사건이 유일하다. 하지만 의친왕 숭배자들은 그걸로는 부족함을 느꼈는지 없는 일을 만들어 내서 돌아다닌다. 이하는 그들이 퍼뜨리고 다닌 거짓이다.
1. 다른 사람의 공적 절취
“공립신보 주필”, 공립협회 활동과 안창호와의 관계 이건 모두 진짜 독립운동가 이강李鋼의 사적이다. 다른 사람의 공적을 가로채는 아주 악질적인 수법이다. 이때 의친왕 이강李堈은 미국 동부에서 미국 여성들과 교제하고 호탕한 씀씀이로 가십기사를 양산하고 있었다.
2. 친일파를 의병으로 둔갑
1909년 10월 거창 정태균의 집에 가서 의병 활동을, 1909년 10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이때 의친왕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태균은 친일파로 의병 토벌대를 후원하고 있었다. 의친왕을 띄우려다 보니, 친일파도 의병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3. 제국익문사란 소설
제국익문사, 이건 희대의 코메디다. 의친왕과 관련 증거 하나도 없다. 독리였다는 이호석은 집사를 사촌으로 둔갑시킨 것이며, 차관이었다는 홍순형은 작위는 거절했지만 총독부 목배를 받은 데다 나이 70에 혼인빙자 간음으로 피소될 정도로 행실이 좋지 못했다. 여기에 신도비가 이강 글씨라며 세종 부강면의 김재식까지 엮었다. 무리하게 소설을 쓰다보니 그의 “내장원경” 경력을 강조했지만 김재식은 실제 취임한 적 없었다. 또 갑자기 이주해와 부호가 되었다 하나 대대로 그 지역 집안이었고, 삼남의 삼대 부호라고 과장했지만 청주에서조차 삼대가 안될 듯하다. (거짓이 거짓을 낳은 셈)
4. 거짓말의 거짓말
벳푸 온천 압송설, 사동궁 몰수설 같은 거짓 선동은 앞서 이야기했으니 패스.
5. 사실 날조
김구, 김규식이 귀국했던 45년 11월 23일 의친왕을 찾아갔다고 주장하나, 이날 임정요인은 숙소로 지정된 최창학의 집으로 바로 들어가 이승만만 만나고 일절 면회 사절. 망자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분식하는 것도 망자에게 누가 되는 일이란 걸 모르는 듯.
이강, 그냥 내버려두면 그 정도의 평가를 받을 텐데, 분칠을 잔뜩하니 괴물이 되어버린 듯하다. 거기에 친일파 의병 둔갑, 모든 것이 그의 밀명, “비밀” 독립운동에 온 천지가 아지트란 역사왜곡은 덤. (아래 사진은 대구대학교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