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대한제국 육군부장 의친왕, 군대 해산되던 날 피서 가다.

자불어 2024. 10. 3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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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1. 삼성장군 의친왕

세종특별자치시 발간 자료집 p.3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육군 3성 장군" 의친왕 편이다.  자료집 첫머리의 의친왕 소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서양 의술을 적극 들여오는 한편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으로 군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 시절을 보자. 고종실록에는 의친왕에게 육군 계급을 수여하는 기사가 나온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임용하고 정2품 이근호李根澔를 주전원경主殿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했다. (하략) ”-고종실록 권47, 광무10년 (1906) 4월 8일(양력)

의친왕이 육군 계급을 받은 건 1906년 4월 8일이다. 의친왕은 육군 부장(副將)에 임명되었다. 부장은 대장 아래인 까닭에 “3성 장군”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받는 보직은 시종무관부 무관장, 동궁배종무관부 무관장, 참모부 총장, 교육부 총감 등이다. 예를 들면 1896년 육군부장이 된 민영환은 군부대신으로 임용되었다. 이강은 4월 18일 원수부 찬모관贊謀官이 되었다. 

이어 의친왕 이강은 일본 관병식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군부대신 직함을 받았다. 사절 대표였기 때문이다. 관병식은 4월 30일에 열렸다.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해 개최한 것으로 의친왕은 이때 일본 천황으로부터 일본국 日本國 훈1등勳1等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을 받았다. 의친왕이 육군 장성으로 한 일은 이게 전부다. 그럼 군대 해산 전후 이강은 뭘 했을까?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군대 해산 조령을 내렸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순종이 조서를 반포한 다음날인 1907년 8월 1일, 통감부 지휘 아래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많은 장병이 해산을 거부하고 저항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남대문 전투, 이후 정미의병) 8월 1일 시위대 제1대대 참령 박승환이 자결했고, 같은 날 부위 오의선도 순국했다.


그러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될 때, '삼성장군' 의친왕 전하는 군대를 지키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왕피서義王避暑: 의친왕 전하께서 피서차로 금일 상오 8시 50분에 경부선 철도 제1번 열차를 탑승하고 일본을 출발하셨는데, 경찰과장 이헌규씨가 족질 1명을 대동하고 보호차 부산까지 내려갔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7.07.30.

대한매일신보 1907.7.30.

맞다. 피할 피避, 더울 서暑, 그 피서다. 군대가 해산되고 장령들이 자살할 때 삼성장군 의친왕 이강은 일본으로 바캉스를 떠났다.(어떤 기록에는 의친왕이 일본 옷, 일본 음식을 매우 즐겨 서울에서도 그리 살았다고 전한다.) 의친왕은 육군부장으로 임용된 1906년부터 1907년 사이에 육군과 관련해 어떤 일도 안했다. 산천유람을 즐기고 명소에 정자를 지었을 뿐. 의친왕은 이런 사람이다. 

후손이 자기 조상 미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 세종시가 나서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국민의 세금으로 그 대열에 동참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종시장 블로그(잊힌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최민호의 월요이야기 - 제78호('24.8.12.)])를 보니 의친왕 숭모 작업이 여기서 그치지는 아니할 듯하여, 세종특별자치시 발간 자료집의 심층 분석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군대해산 날 피서 떠난 대한제국 육군 삼성장군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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