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적십자사 총재 의친왕,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 의료시설을 합병하다.

자불어 2024. 11. 2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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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2.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인천 적십자병원 - 러일전쟁 중 러시아인 부상병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편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료집에서 캡처

“1906년 7월 12일 의친왕은 고종황제로부터 칙명을 받고 대한적십자사 재에 취임하여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서양식 의료체제를 한국에 적극 도입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역시 해외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이준,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세종특별자치시, 2024), p.18.)

일단 의친왕의 유학생활은 환락으로 점철되었는데, 무슨 경험을 살려 서양 의료 체제를 적극 도입했단 말일까? 그럼 의친왕이 적십자사 총재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살펴보자. 의친왕은 1906년 7월 12일 총재에 임명되었다.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을 적십자사 총재總裁에서 해임하고 의왕義王 이강李堈으로 대신하였다. (고종실록 권47 광무10년 7월 12일)

[적십자사 도로 건설(赤社治道)] 의친왕 전하께옵서 적십자사 총재로 그곳에 출근하실 터인데 가는 도로가 울퉁불퉁(傾仄不平)한 고로 경무청에서 이 도로를 조만간(不日) 수축한다더라. (황성신문 1906.7.18.)

의친왕이 적십자사 사장에 임명하고 바로 일어난 일은 도로 공사였다. 왕족이 출근하는데 불편할까 경무청은 도로를 깔았다. 1906년이다. 나라는 풍전등화였건만 예산 집행은 이런 식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런 나라였다. 뭐 의친왕이 직접 한 일은 아니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의학교 합병(醫校合社)] 적십자사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의학교를 적십자사로 합병하여 의학교 관제는 폐지하고 그곳 사장은 의친왕 전하의 수행원 유세남劉世南 씨로 선정하고 부사장은 한응리韓應履 씨로 추천한다는 설이 있더라. (황성신문 1906.7.17.)

[의학교 폐지(醫校廢止)] 학부 소관 의학교의 일체 사무는 지금 이후로 적십자병원에서 관할 하기로 의학교는 폐지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6.7.17.)  

의친왕은 서양의 의료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서구식 병원을 통폐합했다. 일단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유세남은 관리 출신이고, 한응리는 의친왕의 수하로 병원엔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적십자회의赤十字會議 결과 보도(後報)] 스위스 제네바 시에서 개회한 만국적십자회의에서 지난 7일에 각국 대표자가 각각 의결 사항에 서명하고 또 평화 시기에 적십자 규약의 응용에 관한 일체 논쟁은 헤이그 중재재판소의 판단에 위임함을 결의하였는데, 한국, 영국, 일본의 대표자가 그 결의를 반대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6.8.7.)

이준은 “대한적십자회 역시 해외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영일동맹에 바짝 붙어 의결권을 행사했다. 외교권 박탈 전이었음에도 세계 무대에서 적십자는 일본의 뜻을 따랐다. 물론 의친왕이 적십자사 총재였을 때 있던 일이다.


[병원 부지(病院基址)의 가액價額] 이토 통감의 의견에 따라 대한병원大韓病院을 동서東署 마등산馬登山에 설치하여 적십자병원과 광제원을 합병한다는데, 해당 장소의 지적도(四標圖形)와 경계 내 들어온 가옥과 토지를 두 차례 측량하고 지적도를 조사하여 한성부漢城府에서 내부에 보고하고 그 가액을 지불했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온 가옥과 토지의 보상액이 25,655환 80전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06.09.23.)

의친왕 전하께옵서는 대한의 근대 의료 기관을 모조리 합병했다. 진즉에 의학교를 적십자병원과 합치더니 결국에는 적집자병원, 광제원을 합쳐 대한의원을 만들었다. 대한의원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 대한의원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적십자사赤十字社의 사무가 중요하니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을 기복起復시켜 공무를 행하게 하되, 총재總裁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권48 1907년 1월 18일)

그래서였을까? 결국 고종은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려 의친왕의 총재직을 면했다. 조령의 방점은 “적십자사의 사무가 중요하니”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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