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부강면 홍판서댁은 독립운동 근거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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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부강면을 독립운동사적지로 추진하며 홍순형洪淳馨에 주목했다. 이에 앞서 시는 부강면의 고택을 기존의 '유계화 가옥'에서 ‘홍참판 댁’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지난 6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황당한 행사를 거창하게 진행했다. 이 행사 자료집 원고에 따르면,
또 한 명의 제국익문사 요원, 여문 홍순형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세종 인물이 있는데, 바로 여문 홍순형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으로 헌종비 효정왕후의 조카이다. 1874년 증광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중략)… 제국익문사의 사기(차관급)이 되어 이호석 독리를 보필하는 한편, 세종 부강면 김재식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서를 짓게 된다. 제국익문사로서 1906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공식 임명 받은 이후 공식 기록은 모두 사라진다. 1910년 한일병탄 시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기록 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건축학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홍순형 판서의 고택은 세종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홍순형 판서의 세종에서의 공식 활동 내역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송암 김재식 고택을 중심으로 홍판서댁에서도 의친왕, 이호석 등과 함께 충청 지역 항일운동의 아지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이영주, 황실 직속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의 세종, 충남지역 항일활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자료집), p.56.)
이영주는 홍순형이 제국익문사 사기(차관급)이며 그의 고택을 중심으로 의친왕, 이호석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했다. 일단 홍순형이 제국익문사의 사기(차관급)가 되었다는 건 근거가 없다. 이영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기록 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고 하고는 (기록도 없다면서) 세종에서의 공식 활동과 아지트를 운운한다.
그러나 이영주의 말처럼 진짜 홍순형(1858~1934)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 사실 적지 않다. 일례로 홍순형은 1926년 순종이 사망했을 때 능묘 조성을 주관했던 산릉제거山陵提擧 중 한 명이었다. 대구시의 순종 동상 철거에 울분을 토했던 의친왕기념사업회가 그것도 몰랐단 말인가?
그럼 남아있는 홍순형의 자료를 근거로 세종시의 독립운동사적지 조성 사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하겠다.
1. 홍순형은 작위를 거절했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에 따르면, 홍순형은 작위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그럴까? 강점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대한제국의 옛 고관에게 작위가 수여되었다. 홍순형은 남작 수작자였다. 남작에게는 은사금 25,000원이 제공되었다.
귀족계의 활불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 문곡 사는 남작 홍순형씨는 자기가 사환하는 남녀노비 등 50여 명에게 신구 등급을 정하여 상등의 100원으로부터 하등의 6원까지 나누어 준 돈이 1600원이오, 그 면 내 일공동리 700여 호 인민의 금년도 양기兩期(상하반기) 호세를 자담(자신 부담으로) 상납하였음으로 홍씨의 자선 사업은 가히 귀족계에 희한한 활불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더라.(매일신보 1912.5.14.)
위 기사는 "홍순형 남작"을 "귀족계의 활불"이라고 했다. 그러나 홍순형이 작위를 반납한 것은 분명하다. 1912년 12월 6일 조선총독부 관보 고시에 윤용구尹用求, 한규설韓圭卨, 유길준兪吉濬, 민영달閔泳達, 조경호趙慶鎬와 더불어 원에 의해 작위의 반환을 윤허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왜정시대 인물자료란 책은 “일한병합을 따르지 않고 항상 배일적 언동을 하는 자”로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의 삶 어디에도 독립운동을 찾아볼 수 없다. 1917년에는 총독부에 밭 184평을 도로부지로 기부하고 목배木杯를 받았으며, 1928년에는 소화 대례기념장도 수령했다. 그가 작위를 반납했음에도 1928년 1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축년파산逐年破産하는 조선朝鮮의 귀족貴族)는 홍순형을 수작자로 언급했으며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한민 제6호, 1936년 8월 29일자도 홍순형을 수작자로 분류했다.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홍순형댁에 홍순형이 거주했나?
앞서 홍순형의 거주지는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 문곡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곳은 현재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다. 홍순형은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무덤도 이곳에 있다. 그러면 세종시가 그 고택을 홍순형댁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홍순형과 세종시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문화재청(현재 국가유산청) 고시에는 변경 사유로 1898년(광무 2년)∼1904년(광무 8년) 충청남도 문의군양안에 가옥 소유자로 성명에 홍순형(洪淳馨)이라고 기록 되었다고 했다. 1896년 이래 홍순형은 한성 대안동(안국동)에 거주했다. 위의 양안이 작성된 시기(1898~1904) 내내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부강에 집을 구입할 수는 있어도 서울을 떠나 그곳에 살 수는 없었다. 즉 소유주일 뿐이었다. 홍순형은 오늘날 세종을 비롯하여 충청도에 상당한 토지를 보유했다.
사음전舍音戰과 소작전小作戰(마름의 전쟁과 소작인의 전쟁), 한 토지에사음(마름)이 둘이 되어 소작까지 불안한 중이라고
충북 청주군 강서면 경찰관 주재소에서는 지난 12일에 마름 두 사람과 소작인 십여 명이 시비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서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바, 경관들은 그 일에 대해 원만히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는 데, 그 자세한 말을 들은 즉, 양주군 와부면 문곡리 홍순형의 토지가 청주군 오창면, 강서면 두 면에 있는데, 동군 옥산면 소로리 김병연을 관리인으로 두어 온 지기 십여 년이더니 금년 3월 10일 경에 동군 강외면 궁촌리 이시영은 그 관리권은 자기가 얻었다는 표를 받아 온지라 김병연은 급히 양주에 가서 어찌 하였는지 사음 복구표를 받아 왔음으로 두 사람이 서로 다니며 사음표를 받아 온 것이 각기 세 통이라 사음 두 사람은 권리 경쟁이요, 소작인 십여 명은 소작권이 이동될까 염려하여 농사는 임박한 때 허송세월을 하는 모양이더라.(청주)[조선일보.1923.05.24.]
위 기사에서 사음은 마름이다. 부강면의 홍판서 댁은 홍판서가 살았던 집이 아니라 홍판서가 한 때 소유했던 집으로 당시 세를 놓았을 것이다. 충청도 토지는 마름에 의해 관리되었다.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일이 있으면 마름이 찾아가는 구조였다. 즉 홍판서는 이 집에 살지 않았다. 지금 세종시는 부재지주를 기념하겠다고 하는 셈이다.
3. 홍순형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면 홍순형은 이 많은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62호, 1933.4.1.)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 속에 성세를 이뤘던 부원군 가의 당시 모습을 기사로 남겼다. 제목은 “조선고관朝鮮高官 성쇠기盛衰記, 몰락沒落에 비읍悲泣하는 조선삼부원군가朝鮮三府院君家, 당년세도當年世道 어금於今에 안재安在”로 요즘 말로 풀면 “조선고관 성쇠기. 몰락에 피눈물 흘리는 조선의 세 부원군가. 당시의 세도 지금은 어디 있나.” 그러면 기사를 보자.
철종이 승하하신 후에도 조대비가 장수하시고 민중전이 고종의 정궁으로 친정을 위해 세력을 붙드는 바람에 홍대비 친정은 세도는 고사하고 그의 족하 홍순형이 간신히 판서까지 하였다. 오래 적막하다가 판서까지 한 그는 돈에 어찌 무서웠던지 그가 황해감사로 도임한 지 얼마 안되어 황해도 백성이 반반한 옷 한 벌이 남지 않았고 그가 송도유수(松都留守)로 잇는 동안에 송도 부자들이 다리 뻗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러듯 지긋지긋하게 모은 돈이 벼 만석이나 하야 소위 양대의 부자로 민영휘의 다음을 차지했다. 그러던 부자가 후사로 들인 아들 홍인표(洪麟杓)에게는 담배 한 갑 한 푼도 주지 않아 평생 고생을 하다 죽게 되고 팔선녀를 꿈처럼 즐기며 선물로 얻은 아들 학표(鶴杓)에게 사랑을 편벽되이 주다가 미두판, 요리집, 도박장으로 다 없애고 지금은 양주(楊州) 덕소에서 팔십지년에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노인이 조밥으로 목을 축이고, 남을 잡아다 볼기치던 그가 오라를 지고 몇백 리식 끌려다녔으니 그것도 무슨 연분이랄가.
그의 재산은 조선 말기 지방관을 하며 가렴주구로 얻은 것이었다. 오죽하면 저런 말이 다 나왔을까. 앞서 마름을 이리저리 교체했던 것도 탐욕스러웠던 그의 삶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으니, 아래 기사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칠십 노옹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 정조만 유린하고 돌아보지 않아, 원고는 이십세의 소부
양주군 미금면 수석리 김오묵이라는 방년 20세의 미인은 동군 와부면 월문리 홍순형이라는 70여 세의 늙은이를 지난 15일에 2500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원고가 제소한 이유는 지난 1월 중순 경에 강석근이라는 사람의 소개로 피고와 부자연한 결혼을 하였었다. 홍순형은 김오묵을 가마를 태워 데려간 지 나흘만에 본집으로 돌려보내고 돌보지 않음으로 원고는 정조만 유린당한 셈이 되었다. 이래서 2500원을 정조 유린 대가로 지불하라고 하였다. 피고는 약 30만원 재산가라고 하며 또는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사회의 신용도 잃었다는 데 김오묵은 홍순형에게서 온 편지 한 장과 중매를 든 강석근을 증인으로 신청하였다.(매일신보 1931.4.16.)
*와공면 문곡은 1914년 와부면 월문리로 변경되었다.
홍순형은 누구(?) 못지 않게 "축첩蓄妾 "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오죽하면 나이 70에 20대 여성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피소되었을까. 일제강점기 제국익문사의 존재는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영주 씨는 홍순형이 "제국익문사의 사기(차관급)"라고 주장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을 숨기려고 기생을 불렀다더니, 홍순형도 독립운동을 감추려고 첩질을 했던 걸까? 홍순형은 세종과도, 독립운동과도 무관한 인물이다. "시대의 증언"은 도대체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란 말인가?
세종특별자치시는 유적지를 조성할 생각을 하기에 앞서 해당 자료가 어떤 자료인지, 지역에서 인물을 기리려면 평생의 사적이 합당한지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사실 규명도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역사 바로세우기를 한단 말인다. 해당 문화유산은 건축적인 가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하는, 또는 내용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종찬 광복회장, 이희완 국가보훈부 차관까지 초청해 국민과 시민의 세금으로 학술대회를 열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세종시의 황당한 학술행사, 있는 사실을 외면하고 역사를 가공하는 그들의 모습, 여기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