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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제국익문사-송암 김재식, 세종시의 역사 조작

자불어 2024. 6. 3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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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
최근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행사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행사의 주요 요지 가운데 하나는 세종시에 거주했던 김재식의 독립운동 활동을 규명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해 세종시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근거지, 세종"을 주제로 사적지를 조성해 보겠다는 목적도 겸하고 있다. 

행사 포스터

이 행사에서는 세종특별자치시 최민호 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더불어 국가보훈부 이희완 차관,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축사를 했다. 이번 행사는 당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었고, 향후 사적지 조성 사업까지 함께 한다면 더 많은 세금이 투입될 터다. 

일제의 강점에서 일신을 다 바쳐 노력한 독립운동에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런 만큼 독립운동 서훈 지정 여부는 엄격해야 한다. 독립운동과 더불어 친일 행적이 있다거나 혹은 후손의 기억에만 의존, 가공, 과장된 부분이 있는지 엄격히 살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번 학술행사의 중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김재식의 독립활동 여부다.  그러나 이번 학술행사는 "김재식은 독립운동을 했다"를 주장할 뿐 근거라고는 종이쪼가리 하나 없는 후손의 기억(증언이라고 하나 자신의 기억도 아니다)또는 전직 역사학자의 괴상한 글뿐이다. 이에 몇 가지를 제시하며, 이번 행사가 더 큰 세금 낭비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1. 김재식의 신도비와 고가에 있는 송암신정기는 의친왕이 지어주었다. 
2. 김재식은 대한제국의 재산을 관리했던 내장원경을 역임했던 이로 제국의 재산을 관리했던 역할을 했다. 
3. 고종은 1902년 이후 제국익문사의 운영을 의친왕에게 맡겼는데, 의친왕은 귀국 후 황실재산 관리 경험이 있던 김재식을 부강에 정착시켜 황실 금광을 관리하게 하고 그 이익을 독립자금으로 썼다. 

여기서 중요한 고리는 2번, 김재식이 선택된 데는 제국의 재산을 관리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발표자 중 이영주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0년, 송암 김재식은 의친왕의 명으로 현 세종시 부강 용포리로 이전하여 의친왕 소유의 금광을 대리 관리하며 부를 축적하게 되며 충청도 이남 3대 부호로 소문나게 된다. 김재식의 부친이 부호였던 것이 아닌 만큼 김재식이 갑자기 1910년 부강으로 나타나 큰 부호가 된 것은 지역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김재식의 수완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친왕은 특별히 제국익문사 활동을 위해 경부선 철도를 틀어 부강역을 통과하게끔 원 계획에서 변경시켜 주어 금광의 수익을 보부상들을 통하여 부강포구와 부강역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독립 자금을 전달하는데 활용하였다. 당시 이호석은 의친왕의 밀명으로 십 수차례 방문을 하며 송암 김재식 고택을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고 이곳을 제국익문사 충청도 거점 사무실로 삼았으며 금강의 경치를 즐긴다는 명목으로 송암 김재식 고택을 의친왕께서 친히 방문하시어 이호석과 김재식, 그리고 여문 홍순형과 체계적인 항일활동을 나누며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행들이 김재식 고가와 정자에 들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영주는 김재식이 의친왕의 명을 받고 1910년 갑작스레 부강으로 이주했으며, 지역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했으나 이는 무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세종문화원에서 발간한 자료(세종시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IV), 2014, pp.199~204)에 따르면 김재식의 집안(경주 김씨 학은공파)은 선대 김세언이 중종 기사년(1509) 문과에 급제하고 청주 낭성으로 내려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재식의 아들들은 부친의 원고를 모아 1930년 송암집이라는 문집을 출간했다. 여기에 따르면 김재식의 부친 김정수(1838~1902)는 충훈부도사를 역임했고 무덤은 (당시 지명)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에 두었다. 이 부용면에는 김재식의 부인 부안 임씨의 무덤도 있다. 이는 김재식 가계가 오늘날 세종과 청주 접경 지역에 세거 했던 것을 보여준다. 의친왕의 명 때문에 이주했다고? 미스터리라고?(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스토리는 날조에 불과하다.) 그리고 김재식이 충청도 이남 3대 부호로 소문났다고 했는데, 그 말의 근거는 무엇이며 3대 부호 중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인가?  언급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의친왕이 소유했다던 금광은 부강면 어디인가?(집안에 문서라도 있는가? 아님 이 역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청주에 소규모 금광이 있긴 했으나 부강은 아니다. 그리고 금광을 운영하려면 인력과 물자, 정련시설도 필요해서 당국 몰래 운영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는 또 의친왕이 제국익문사 활동을 위해 경부선 철도를 틀었다고 했다. 경부선 철도는 1905년  개통되었다.  따라서 노선의 설계는 그 이전에 끝났다. 1905년까지 의친왕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었다. 이 시점 의친왕은 철도노선에 개입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업자는 금광의 이익을 보부상을 통해 전국으로 보냈다고 했는데, 보부상이 기차 타고 다녔단 말인가?) 허황된 이야기다. 이처럼 대한제국 황실 독립운동 운운하는 이들은 일제가 너무도 강력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면서도 자신들의 활동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엄청난 초능력을 발휘한 듯 주장한다. 또 상식에 부합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증언이라며 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서 중요 고리 중 하나는 "대한제국 재산 관리 경험(내장원경)이 있는 김재식"이다. 김재식을 내장원경에 임명했다는 기사는 (의친왕기념사업회에서 믿지 못할 사료로 치부하는) 고종실록에 실려 있다.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2월 1일 양력 3번째 기사(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육군 참장(陸軍參將) 원우상(元禹常)을 육군 법원장(陸軍法源長)에,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 심건택(沈健澤)을 비서원 승(祕書院承)에, 종2품 김재식(金在植)을 내장원 경(內藏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군부 대신(軍部大臣) 권중현(權重顯)에게 참모부 총장(參謀部 總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가 내장원경을 실제 역임했을까? 대한제국에서 늘상 벌어졌던 것처럼 혹여 취임하지 않았거나 단기간이었을지도?  발표자 이태진은 그것을 발견했다. 바로 의친왕이 지은 김재식 신도비문이다.

"광무 5년 (1901) 창능(昌陵) 참봉의 직을 받고 6년에 당상으로 올라 중추원 의관(議官)이 되고 8년(1904)에 내장원경을 배수(拜受)하였다. 그러나 모두 나가지 않고(不就) 평생 분화(粉華)를 멀리했다."

그들의 주장에 반하는 이야기를 의친왕이 했던 것이다.(거짓말도 박자가 맞아야...) 이 사실에 이태진은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의친왕은 1898년에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으므로 이전의 김재식 관력에 대한 지식이 온전치 않을 수 있다. 비문 자료는 참고에 그쳐야 할 내용이다.”

여기서 1898년에 귀국했다는 내용은 “1898년 이래로 외국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으로 정정해야 할 것이다. 의친왕은 미국에서 1905년 귀국했다. 이 정도 오류는 논지를 바꿀 정도도 아니니 눈감고 넘어가자. 그런데, 이리 말하고 결론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이 조건에서 의친왕이 1905년 2월 황실 재산 관리 총책인 내장원경 역임의 부강면 거주 김재식과 금광 개발에 나선 것은 제국익문사의 활동자금 확보와 유관할 것으로 파악되었다. 황실의 방대한 재산을 관리한 경력의 소지자 김재식을 의친왕은 제국익문사의 동지로 동원한 셈이다.”

바로 앞에서는 김재식 관력에 대한 지식이 온전치 않을 것이라더니 또 뒤에서는 "유관할 것"이라고 말한다. 앞뒤가 안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김재식은 내장원경을 했던가? 아님 취임하지 않았던가? 이 부분의 규명을 위해 다시 김재식의 문집인 송암집으로 돌아가보자. 송암집에는 김재식의 가계가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문도 부기한다.)

송암집과 송암집에 수록된 일본인의 시(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는 천보, 호는 송암이다. 철종 경신(1860) 11월 23일 출생, 광무5년(1901) 창릉참봉, 6년(1902) 당상에 올라 중추원의관을 받았다. 8년(1904) 내장원경에 배수되었으나 일절 나가지 않고 복상하며 여막에서 3년을 지냈다. 무진년(1928) 2월 24일 죽었다. 향년69세. 문집 2권이 세상에 나왔다. 효행이 남달랐다. 판서 송도순 등 여러 유림이 만장을 지었다. 묘는 청주군 낭성면 무성리 뒷산인 무성산에 묘좌향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의왕 이강이 짓고 판돈녕원사 윤용구가 글씨를 쓰고 판서 민경호가 전서를 제했다. 갈이 있는데 참판 이규항이 지었다. 참판 이명상이 지와 행장을 지었다.
배우자 정부인 부안 임씨는 (임)노봉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묘는 같은 군 부용면 문곡리 뒤 유모봉에 간좌향이다. 갈과 지가 있는데 아들 학현이 썼다. / 배우자 정부인 계림(경주) 이씨는 (김)집경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 배우자 정부인 보성 오씨는 (오)재성의 딸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字千甫, 號松菴 / 哲廟庚申十一月二十三日生, 光武五年除昌陵參奉, 六年陞堂上拜中樞院議官, 八年拜內藏院卿皆不就, 居喪哀毁廬墓三年, 戊辰二月二十四日卒. 享年六十九, 有集二卷, 行于世. 孝行卓異, 有判書宋道淳贊及儒林等狀. 墓淸州郡琅城面武城里後麓武城山, 卯坐, 有神道碑義王李堈撰. 判敦寧院事尹用求書, 判書閔京鎬篆, 有碣, 參判李圭桓撰, 參判李明翔撰誌及行狀.
拜貞夫人扶安林氏魯鳳女生一男 / 墓同郡芙蓉面文谷里後乳母峰, 艮坐. 有碣及誌. 男學贒述. / 拜貞夫人鷄林李氏集敬女, 生一男. / 拜貞夫人寶城吳氏在聖女, 生一男一女.

그렇다. 고종이 내장원경에 배수한 시점, 김재식은 복상 중이었다. 김재식이 이 기간 복상했다는 이야기는 문집 내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효행을 기리며 효행록을 남겼고, 그의 아들들은 문집을 펴내며 말미에 덧붙였다. 김재식이 취임하지 않자 고종은 이틀 뒤 오영석을 내장원경에 임명했다. (아래 자료 참고)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2월 3일 양력 3번째 기사 /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정2품 정주영(鄭周永), 육군 참장(陸軍參將) 구영조(具永祖)를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正)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종건(李鍾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남정철(南廷哲)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종2품 오영석(吳榮錫)을 내장원 경(內藏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1품 하성일(河成一), 정3품 민의호(閔儀鎬), 정3품 박승목(朴勝穆), 정3품 민충식(閔忠植)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학술원 회원 이태진이 이 기록을 못봤다면 게으름뱅이로 역사학자의 자질이 없는 것이고 보고도 그런 소릴 했다면 거짓말쟁이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다. 사료의 앞뒤 맥락을 읽지 않고, 주장에 매몰되어 말도 안되는 가설을 늘어놓은 셈이 아닌가. 김재식은 효행과 더불어 시작(詩作)으로 유명했다. 그의 문집에는 회갑연에 받은 시가 여럿 있는데, 그중 일본인이 보낸 것도 있다. 

예로부터 예순도 드문데 1년을 더하니
응당 수복이 겹쳐졌다 하겠다.
도주공이 이룬 부로 기쁨을 누리며 
하얀 국화 지초, 난초로 집안을 채웠다.
전원에선 금검절약의 모범이 되고
부부는 화목하고 자손은 현명하니 
봉황이 춤추고 거북이 노니는 상서가 당도해
잔치 술잔에 하늘이 저문다.

古稀六十又一年 
壽福重重理固然 
陶朱猗富眞欣喜 
白菊芝蘭滿室圓 
田園勤儉爲模範 
琴瑟相和子孫賢 
鳳舞龜遊吉瑞至 
筵席酒盃夕陽天

일본인 시이노 에이이치(椎野榮一)

세종시의 인물로서 김재식은 기억할 만한 인물일 수 있다. 김재식은 효행으로, 그리고 한시(漢詩)로 유명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아니다. 의친왕이 지어줬다는 신도비명, 신정건립기 그 어디에 독립운동 행적이 보이는가?  구전설화를 제외하면 의친왕과 (사망 전) 김재식의 관계를 입증할 자료가 있는가? 하지않은 일로 포창하는 일은 고인에게도 누가 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세종시가 김재식을 기념하기로 했다면 김재식의 문집부터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것 없이 소위 황실 후손(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사무국장 모두 발표자라니...)과 대한제국 찬양에 매몰된 전직 역사학자를 초대해 결론이 정해진 독립운동 운운은 “학술대회”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들은 이런 비판에 그건 사소한 문제다. 일부 잘못 파악한 부분이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거라고 기껏 제시하고 "아니어도 상관없어"라는 태도는 제 스스로 자기 말이 허언, 허설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황실 독립운동 운운은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의 근대판이라 할 것이다. 이런 근거 부족한 허위 주장을 설파하는 학술행사는 시장은 물론, 광복회장, 국가보훈처 차관의 명예까지 훼손하는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며, 또한 순종 동상 헤프닝의 반복이 될 것이다.

황실의 독립운동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지, 역사를 어떻게 날조하는 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국익문사 차관이라고 주장했던 홍판서의 실제 행적, 진짜 독립유공자인 동명이인 이강 선생의 사적을 의친왕의 기록에 끼워 넣은 행위 등, 궁금하시면 다음 글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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