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김구와 김규식은 의친왕을 찾아가지 않았다.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개최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11월 23일 김구와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사동궁에 의친왕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을 요청하였고, 의친왕은 이를 수락하였고 운현궁 양관을 한국독립당 당사로 사용하고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하였다. 1947년 3월~1949년 8월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을 역임하였으나, 이외에는 일부러 적극적인 정치참여나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피했다.
의친왕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까지 황실, 또는 의친왕이 사람들로부터 꽤나 존경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족 신문이나 천도교 등에서 발행한 잡지에서조차 의친왕은 주취나 축첩으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나 경성신문는 의친왕의 거둥을 건조하게 기술했다.) 그럼에도 국외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 했던 이들이 국내에서 호의호식했던 사람을, 옛 황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이쿠나 가자마자 인사드려야지" 했을까?
그러면 의친왕기념사업회 이준 회장의 말대로 1945년 11월 23일 김구와 김규식 등 임정 요인이 의친왕을 찾아간 것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중앙신문 1945. 11. 2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씨 이하 수뇌 일부와 수(행)원 등 일행 15명은 23일 오후 4시 20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꿈에도 잊지 못하던 해방된 고국의 수도를 자동차로 달려 숙소로 결정된 죽첨정竹添町(충정로) 1정목 1번지의 최창학崔昌學 씨 댁에 든 것은 이날 오후 5시 15분 경이었다. 벌써 며칠 전부터도 이 저택은 경관들이 경계해온 터이지만 이날 오후부터는 경계가 더욱 삼엄하여 부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김구 씨 이하 요인이 도착하나보다고 기다리던 중 이승만 박사의 자동차가 이 집 문 안으로 들어간 지 수 분 후인 5시 15분경 5~6대에 나눠타고 미국 헌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드디어 일행은 이 저택의 문을 들어선 것이다.
[자유신문 1945. 11. 24.] 지난 23일 오후 1시 상해공항을 출발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4시 김포비행장에 내린 일행은 MP(헌병)의 삼엄한 경계 하에 숙소인 축첨정 1정목 최창학 씨 댁으로 자동차를 달려 입경 첫날 밤을 지냈으며 같은 날 밤 임시 정부 선전부장 엄항섭 씨로 하여금 별도의 감격에 넘치는 스테이트먼트(연설)을 발표했는데...(하략)
일체로 면회를 사절하고 고토와서 침묵의 첫날 밤, 오늘부터 활동 개시에 기대
지난 5일 중칭(重慶)을 출발한 지 18일 만인 어제 23일에 입경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엄항섭 선전부장의 6씨를 비롯하여 김규식 박사의 영식인 비서역 김진동 씨, 주석시종 의무주임 유진동 박사, 수행원 장준하, 이영길, 백정갑, 윤경빈, 선우진, 민영완, 안 스산나 씨 등으로 일행은 바로 비행장으로부터 숙사로 들었는 데, 이날 밤에는 일체 면회를 사절하고 정양한 후 오늘 24일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하여...(하략)
이상 11월 23일 김구 등 임정 요인의 일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3:00 상해공항 출발
16:20 김포비행장 도착
17:10 전후 이승만 죽첨정 숙소 도착
17:15 임정 요인 죽첨정 숙소 도착
18:30 이승만 돈암장 복귀
(이후) 면회 사절 / 정양(휴식)
김구 등 임정 요인은 오후 1시 상해공항을 출발, 오후 4시 20분에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5시 15분 숙소인 최창학씨 집으로 들어왔다. 이곳이 김구가 암살 당할 때까지 숙소이자 집무실로 썼던 경교장, 즉 현재 강북삼성병원에 있는 그 건물이다. 그리고 만난 한국 내 인사는 숙소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이 유일하다. 이후로는 정양(휴식)을 위해 일절 면회를 사절했다. 이날 일정 어디에 이강 공이 들어갈 틈이 있는가!
(진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 일행은 이강 공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준의 증언은 틀렸다. 그는 집안 내 전하는 이야기는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럴 땐 대개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가 틀리기 마련이다. 그는 이 증언의 출처, 발언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만일 집안 내 어르신이라면 그분은 기억력에 문제가 있거나 거짓말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임정요인은 귀국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김구 주석의 경우에는 거의 매일의 일정이 신문기사로 남아있다. 함부로 꾸며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준은 공공연한 자리에서 사실인냥 증언을 하기 전에 사실을 확인했어야 한다. 실제 의친왕은 이승만을 먼저 접촉했다.
[자유신문 1945.10.28.] 구한舊韓 의친왕 이박사에 메시지, 일 평민으로 건국에 공헌하겠다고.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하에 불우하던 구한 의친왕 전하는 해외 풍상 40년 해방 조선을 위해 노력해 온 이승만 박사에게 26일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용은 40년간 수고에 감사하다는 것과 앞으로 건국 조선을 위해서 계속 활동해 줄 것. 그리고 자기는 일개 평민으로 신조설 건설에 미력을 다하겠다는 것이라 한다.
그 뒤 의친왕은 김구를 만났다. 김구가 찾아갔을까? 아니다. 의친왕이 경교장으로 찾아갔다.
[자유신보 1945.12.6.] 의친왕 김주석 방문
구한국 의친왕은 5일 오후 2시 50분 죽첨정 숙사로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이시영 씨를 방문하고 여러 가지 간담을 한 후 동 3시 10분에 인사하고 떠났다.(辭去했다.)
김구가 의친왕에게 내준 시간은 20분이었다. 의친왕은 간담 후 인사하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을 부탁,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강이 가입한 정치단체는 따로 있다.
[대한독립신문 1946.10.4.] 계몽과 민생을 주제, 애국협회 발족
수월 전부터 각계를 망라하여 준비 중이던 애국협회는 지난 29일 오후 2시 시내 관훈정 192의 이강공 저에 황학수黃學秀, 이종태李鍾台 양씨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참집하여 애국협회 준비위원회를 열었다는 데 오는 17일에는 결성대회를 거행하고 시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며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리라 한다.
이강은 이 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외 이강이 한국독립당의 고문 등등을 역임했다는 내용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혹여 구전에 근거했다면 사동궁을 드나들던 정치인은 한국독립당이 아니라 이들, 즉 애국협회 회원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또한 한국독립당 고문 등의 직함은 동명이인인 독립지사 이강李剛(의친왕은 한자가 李堈이다.) 선생의 행적을 마치 의친왕의 행적인냥 꾸민 데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공립신보 주필은 독립운동가 이강이었는데, 종종 어떤 매체에서는 의친왕이 공립협회 주필을 역임했다고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름(발음)이 같은데서 온,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착오다.)
(진실) 김구는 의친왕에게 한독당 활동을 부탁한 적이 없다.
또한 이준은 의친왕이 운현궁을 김구의 숙소로 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김구는 운현궁을 숙소로 사용하지 않았다. (중간에 변경되었다.) 허나 운현궁을 훗날 한독당의 당사로 사용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자유신문 1945.11.8.] 김구 주석 숙소, 운현궁으로 결정
중경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의 입국은 임의간 문제인데 입국을 앞두고 영접위원회에서는 숙소 절차에 대해 노력 중이던 바 운현궁이 지목되여 이미 이왕직李王職과도 교섭이 끝났음으로 요인들의 입국과 함께 이 고궁이 숙소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임정위원들이 교섭한 대상은 이왕직이다. 운현궁은 전 의친왕 이강이 어찌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다. 광복 이후 운현궁은 이준의 후사가 된 이우의 아들, 이청의 재산이었다. 이청 가는 일제패망 이후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 매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 소유의 재산도 아닌 것을 의친왕이 어찌 내주고 만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의친왕 이강은 자신의 저택 사동궁이 혹여 국가에 몰수 될까 전전긍긍하던 터다. 그런 그가 친척 재산인 운현궁을 내주었다면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자기 집은 빼돌리고 남의 집으로 선행하는", 또는 "출계한 자식의 재산에까지 손대는" 그런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다. 왜?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진실) 한국독립당 당사로 운현궁을 내준 건 이강이 아니다.
이 짧은 단락도 사실이 아닌 것이 수두룩하니, 도대체 무얼 근거로 저리 언급한 건지 도통 알 수 없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는 것 역시 조상에게 누를 끼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순 없다.
의친왕의 궁궐 사동궁은 이승만 정부가 국유재산화하기 전에 이미 의친왕 이강이 팔아버렸습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아래를 클릭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