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69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세 한탄한 의친왕 이강

러일전쟁의 승리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경제 정책을 주관한다. 그리고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부임한다. 통감은 대한제국 각부 대신을 소집해 시정 관련 회의를 개최했는데, 현재 회의록이 전한다. 1906년 7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제8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이등박문 외 찬정대신 박제순, 대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통역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고쿠부 쇼타로) 등이었다. 이날 열린 회의 안건 가운데 하나가 의친왕 전하였다. 왜? 의병 지원이나 반일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럼 회의록을 보자. 이토 통감: 의친왕義親王이..

이왕가 사람들 2025.05.17

우국지사 매천 황현, 의친왕 이강을 기록하다

우국지사 황현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나라가 500년 간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 죽지 않는 선비가 없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독약을 마셨다. 광복 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그는 1864년부터 1910년까지 편년체 역사서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지방 사림에 눈에 비친 조선, 대한제국 멸망사다. 물론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로 정보의 제한, 또는 사인의 감정이 섞였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고종, 명성황후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최근 의친왕을 숭모하는 단체가 열렬히 활동하며, 여러 독립지사 후손을 찾아다니며 의친왕의 업적을 허위 분식하고 있다. 그들의 나쁜 점 중 하나는 의친왕의 몹쓸 행동이나 일제에 협력했던 모습을 담..

이왕가 사람들 2025.05.17

의친왕 이강, 일본 경찰에 실토하다-의친왕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

신보晨報는 신종보晨鐘報라는 이름으로 1916년 8월 15일 발간을 시작했다. 량치자오梁啓超, 린장민林長民 등이 주도하여 “젊은이가 죽지 않는 한 중국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치 아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신문이다. 이 신문은 1919년 12월 8일자에서 의친왕 망명 사건의 전말을 다뤘다.신문 기사의 말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강이 여전히 미심쩍어 하자 한 거한이 총으로 위협하여 결국 그날 밤 11시를 전후하여 이강 공과 마부 김복삼은 북한산으로 끌려갔다. 다음날인 10일 변장하고 수색역에서 기타에 올라탄 이강 공 일행은 11일 오전 11시 30분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린 이강 공은 압록강 다리를 건너 중국 경내로 진입하려다,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덜미가 잡히게 되었다.갑작스런 일본..

이왕가 사람들 2025.05.15

의친왕, 타인의 삶을 도적질하다.

의친왕을 띄우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공적을 가로채다니! [박종인 기자의 ‘흔적’]의친왕을 띄우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공적을 가로채다니 박종인 기자의 흔적 아무튼, 주말 후손과 학계, 지자체가 조작한 의친왕의 실체www.chosun.com위의 기사를 반드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역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좋은 글입니다. 누가 죽은 의친왕을 도둑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바로 후손이다. 문중, 그리고 자칭 역사학자가 결탁한 거짓놀음. 여기에 세종특별자치시 최민호 시장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국가예산 국민세금 털어넣고 국가보훈부 차관까지 초대해 대미를 장식. 그리고 세종시 언론과 문화운동가들 피쳐링하며 자신들의 수준을 유감 없이 보여준 부강면 독립운동 사적지화 계획. 아직 공화국 시민이 되지 못하고 전근대 ..

이왕가 사람들 2025.05.11

덕혜옹주 장례식, 상주는 누구인가?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녀”라고 하지만 실은 일제강점기 이태왕의 서녀로 옹주가 맞는 표현이다. 쓰시마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와 혼인했다. 결혼 전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은 뒤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신적 강하 이후 영친왕이 생계를 지원하고 또 이혼도 시켰다. 1956년 딸 소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산에서 실종되었다. 박정희 정부 이후 1962년 귀국, 낙선재에 들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1967년 낙선재 내 수강재에 기거하다 1989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관련 소설, 드라마가 있으나 허구가 심해 대체역사로 봄이 타당하다. 위키피디아 덕혜옹주 항목 중 “영결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월..

이왕가 사람들 2025.05.10

나무위키 "의친왕"의 신뢰성

나무위키를 보니 의친왕 숭모자들이 열일한다 생각했고 또 역사학도로서 이런 거짓역사를 술술 풀어내는데 방관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무위키 "의친왕" 항목의 언설은 다소 교묘한 부분이 있다. 최근 이 블로그에서 의친왕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언급하니, 그걸 그대로 쓰되, 슬그머니 양쪽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또는 일제의 기록이니 신뢰할 수 없다로 일단락지음으로 써 객관성을 확보한 척하더라. 그러나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마치 몇 년 전 누군가가 떠들어대듯 대륙 조선설도 일종의 학설이니 공공역사에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했던 말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신문조서를 보면 이강공(전 의친왕)은 끌려간 것일 뿐이며, 독립선언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지들끼리 제멋대로 꾸민 일이라고 했다..

이왕가 사람들 2025.05.10

의친왕의 일본인 첩-후계자 이건 공, 그 출생의 비밀

의친왕 이강을 독립지사로 각색하지만, 그의 불량했던 행실이 여기저기서 뻥뻥 터진다. 후손들은 일제의 음모라며 식민사관, 극우 운운하지만 오히려 일제만큼 그와 그 가족을 우대했던 이들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이 주는 돈으로 호의호색하고 이제와서는 항일지사 코스프레를 하는 건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망한 왕조의 후손이 나라의 재산 궁궐이 제집인양 무단 거주하다 쫓겨난 걸 꽤나 억울하게 생각한다. 궁은 국가의 재산이다. 일가의 재산이 아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소유도 끝나는 것이다. 조선 태조 개국 후 고려왕실이 어떤 대접을 받았던가. 수창궁이 원래 내 것인데 이런 말은 마음으로만 품어야 하는 것이다. 즉 대동단결선언에서도 언급했듯 "융희황제가 (싸우지 않고) 삼보를 포기했을 때" 모두 사..

이왕가 사람들 2025.05.03

대한제국 융희황제 순종, 머리 잘리다

얼마 전 대구시 중구청의 순종 동상 철거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설치: 2013년 대구 중구청장 윤순영 / 철거: 2024년 류구하) 순종 동상 철거 사건은 지방자치단체의 저렴한 문화행정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나라를 들어 일본에 바치기 직전 전국 백성들을 무마하고자 전국을 한 바퀴 돌았던 일인 순행을 기념하겠다고 도로 한 가운데 동상을 세웠다가 또 통행에 불편을 준다며 부숴버린, 예산 낭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을 도외시 한 채 일부 언론은 의친왕 후손인 어느 "황손"의 말을 옮기며 "예우"를 말했다. 동상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동상”에게 예우라니... 아직 전근대 사회에 살고 있나 싶었다. 결국 순종 동상은 철거되었다. 철거 와중에서도 발목을 잘랐다며 어찌나 ..

이왕가 사람들 2025.05.02

엄비가 싫어한 두 사람, 의화궁과 이토 히로부미

의친왕 이강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를 하나씩 소개한다. 아래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론인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1871-1915)의 비망록 의 기록이다. 엄비가 싫어했던 두 사람, 의친왕과 이토 히로부미다. 알고 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깊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영친왕뿐 아니라 의친왕도 부탁했다. 의친왕은 이토 히로부미 사후 통감부로 조문을 갔다. 여하튼 의화군(궁), 의친왕, 이강공의 기록을 차근히 모아보려 한다. 참고로 의화궁이라고 하지만 의화궁주, 또는 사동궁주라는 말은 없다. "궁주宮主"는 본디 여성의 봉호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그런 단어도 만들어 쓰곤 한다.조선의 소요도 여하튼 일단락되었다. 신문지상의 보도로 멀찌감치 바라만 봐서인지 명료하지 않아 두셋 조선통의 이야기..

이왕가 사람들 2025.04.13

고종, 하야시 곤스케에게 의화군 이강을 말하다

1905년 2월,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 고종이 자식 문제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를 불렀다. 곧 의화군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시점이었다. 이날의 대화내용은 하야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 전보에 남아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고종이 #의친왕을 신뢰했고 #제국익문사를 맡겼다는 이들이 있지만 의친왕이 고종을 만난 것 몇 번 안되고 주연집 같은 고종의 문집에는 흔적조차 없다. 오죽하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을까. (이것도 "나조차 속았다"할 것인가?) 그럼 자식 이강을 보는 고종의 심정을 들여다보자. 이에 앞서 미리 말해두지만, 의친왕 숭모꾼들은 이 역시 일제에 의해 오염된 사료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본국에 보내는 전문"이며 ..

이왕가 사람들 2025.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