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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오나라의 대신 주연의 무덤이 1984년 중국 안휘성 마안산시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그의 이름이 적힌 목찰이 발견되었다. [사진 참조] 목제로 총 3건으로 장방형이다. 모두 크기가 동일하며 명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정면 꼭대기 끝 중앙에 묵서로 “謁(알)”이라고 쓰고 오른쪽 아래 한 줄로 “[ ]節右軍師左大司馬當陽侯丹陽朱然再拜([ ] 절우군사좌대사 마당양후단양주연재배)”라고 썼다. 자체는 예서와 해서 중간 정도다. 여기에 나오는 주연의 관작은 삼국지 열전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하 그의 열전을 번역, 소개한다. 출전: 三國志 吳書 卷56 朱然傳 子績, pp.1305~1309. 주연朱然은 자가 의봉義封, 주치朱治 누이의 아들로 본래 성은 시씨施氏다. 처음에 처에게 아이가 없어 연이 13세에 손책孫策에..
선주先主(유비) 목황후穆皇后는 진류인陳留人이다. 오빠 오일吳壹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일의 부친은 본디 유언劉焉과 친구였던 까닭에 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언이 다른 뜻을 두고 있던 차에 [한진춘추漢晉春秋: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자 오吳가 손부인孫夫人을 불러들였다. (이때) 부인은 오로 태자太子를 데려가려 했다. 제갈량諸葛亮이 조운趙雲을 시켜 병력을 배치해 강을 막아 태자가 가지 못하게(남아 있게) 하여 제지할 수 있었다.] 관상 잘 보는 이가 태후의 상을 보더니 고귀해 질 것이라 했다. 언이 이때 아들 모瑁에게 들어오라 하여 모의 부인으로 들였다. 모가 죽자 황후는 홀로 지냈다. 선주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자 손부인孫夫人이 오吳로 돌아갔고 여러 군신들이 선주에게 황후를 맞을 것을 권했다. 선주가 유..
강소 구용현 발견 동오 주전 유물 江蘇句容縣發現東吳鑄錢遺物 1975년 10월 진강박물관鎭江博物館은 구용현句容縣 갈촌공사葛村公社에서 동오가 주조한 대천오백大泉五百, 대천당천大泉當千 및 거푸집을 발견했다. 거푸집은 길이가 약 15cm로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형상이다. 대천당천은 직경이 3.4cm, 무게 6.5g, 대천오백은 두 종류로 하나는 직경 3.15cm, 다른 하나는 3cm으로 무게는 6~6.3g이다. 이 동전은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토제 용범에 쇳물이 주입하여 주조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4매 1조의 거푸집이 총 20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번에 100여 매의 동전을 제작한다. 동전은 표면은 거칠고 몇 개씩 엉겨있으며 외곽에는 갈아내야 할 청동 조각이 붙어있다. 용범 안에..
“승상제갈령丞相諸葛令” 비석은 1980년 여름 소장 탁본 가운데 발견한 것이다. 상당히 드문 삼국시대 비석의 탁본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丞相諸葛令. 按九里堤捍護都城, 用防水患. 今修築竣. 告爾居民, 勿許侵佔, 損壞. 有犯, 治以嚴法. 令即遵行. 章武三年九月十五日. (승상 제갈의 령. 구리제방은 도성을 보호하고 수해를 방지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너희 백성에게 고하니 침범하여 점유하거나 파손하는 행위를 것을 절대 허락치 아니한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엄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명령을 바로 따르라. 장무3년(223) 9월 15일. 비의 높이는 53cm, 너비는 38cm이다. 는 “구리제九里堤는 현의 서쪽에 있고 제방의 길이가 9리다. 노인들에게 전해오길 제갈량이 물살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고 ..
유비 휘하의 대표적 문신, 손건의 열전이다. 손건孫乾은 자가 공우公祐로 북해인北海人이다. 선주先主가 서주徐州를 다스릴 때 종사從事로 벽소했고 [정현전鄭玄傳: 정현이 건을 주州에 추천했다. 건이 (유비로부터) 벽소된 것도 현이 천거했던 것이다.] 훗날 (선주)를 호종했다. 선주는 조공曹公에게 등을 돌리고 건乾을 보내 원소袁紹와 결탁했고 형주荊州에 머무르려 할 때 건은 다시 미축麋竺과 함께 사신이 되어 유표劉表에게 갔는데 모두 뜻대로 되었다. 훗날 표表(유표)는 원상袁尙에게 편지를 보내 형제 분쟁의 변란을 이야기하며 “매번 유좌장군劉左將軍[유비]・손공우孫公祐[손건]와 이 일을 함께 논했는데, 그 고통이 뼈속까지 스며 서로 붙잡고 슬퍼하였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중히 여겼다. 선주先主가 익주益州를 평정하고 건..
미축麋竺은 자가 자중子仲으로 동해東海 구인朐人이다. 조상 대대로 돈을 벌어[貨殖] 동객僮客 만 인을 거느리고 재산 거억을 모았다. [수신기搜神記: 미축이 일찍이 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까지 수십 리를 남겨 두고 길가에서 부인 한 명을 보았다. 축에게 (말 또는 가마를) 태워달라 하여 수 리를 지나자 부인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떠나며 미축에게 말했다. “나는 천사다. 동해 미축의 집에 불을 지르러 가던 차에 그대가 태워준 것이 고마워 이야기해 준다.” 미축이 사사로이 부탁하자 부인이 말했다. “태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대는 빨리 가라. 난 천천히 갈터이니 한낮에 불이 날 것이다.” 미축이 집에 도착해 재물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자 한낮에 화재가 크게 일어났다.] 후에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이 별가종사..
(삼국지) 유언, 촉으로 가다.(전편)유비가 촉 땅에서 바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유언-유장 부자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사 삼국지의 편자 진수도 촉서 서두, 유비의 앞에 선주전을 두어 유언,alsdaskind.tistory.com(전편에서 계속) 유비가 촉 땅에서 바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유언-유장 부자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사 삼국지의 편자 진수도 촉서 서두, 유비의 앞에 선주전을 두어 유언, 유장 부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그럼 이하 그 첫 번째 유언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까만색은 삼국지 본문, 하늘색은 배송지 주석)이때 양[익]주(涼)[益]州의 역적 마상馬相, 조지趙祗 등이 면죽현綿竹縣에서 스스로 황건 自號黃巾이라 칭하고..
유비가 촉 땅에서 바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유언-유장 부자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사 삼국지의 편자 진수도 촉서 서두, 유비의 앞에 선주전을 두어 유언, 유장 부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그럼 이하 그 첫 번째 유언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까만색은 삼국지 본문, 하늘색은 배송지 주석) 유언劉焉의 자는 군랑君郎이며 강하江夏 경릉인竟陵人이다. 한漢 노공왕魯恭王의 후예로 장제章帝 원화元和 연간 경릉竟陵으로 이봉된 지파다. 언焉은 어려서 주군州郡에서 일했는데 종실宗室인 까닭에 중랑中郎에 배수되었으나 후에 스승 축공祝公이 죽자 벼슬을 떠났다. [배송지 의견(臣松之案): 축공은 사도司徒 축염祝恬이다.] 양성산陽城山에 살며 학문에 매진하다가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발탁되어 사도부司徒府에..
*정사 삼국지 관우전의 번역이다. (배송지의 주석은 하늘색으로 표시했다.) 관우關羽의 자는 운장雲長이다. 본래 자는 장생長生으로 하동河東 해인解人이었으나 탁군涿郡으로 망명했다. 선주先主가 향리에서 무리를 모을 때 관우, 장비가 어모禦侮가 되었다.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우羽・비飛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했다. 선주는 두 사람과 침상 하나를 함께 쓸 정도로 우애가 형제 같았다. 많은 무리를 이뤘어도 종일 시립했고 선주를 따라 다니며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촉기蜀記: 조공曹公(조조)이 유비劉備와 하비下邳에서 여포呂布를 포위하자 관우가 조공에게 여포가 진의록秦宜祿을 시켜 구해줄 것을 요구했다며 (성을 점령하면) 그의 아내를 취하겠다고 청하자 공이 허락했다. 막 격파될 때가 ..
삼국지 촉서는 유비劉備를 다룬 선주전先主傳 앞에 유비가 촉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전까지 촉을 다스렸던 유언劉焉과 유장劉璋 부자를 주인공으로 한 유이목전劉二牧傳으로 시작한다. 다음은 그중 유장 부분이다. 유장(劉)璋의 자는 계옥季玉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로張魯가 차츰 교만해셔 유장을 따르지 않자 유장이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을 죽여 서로 원수가 되었다. 유장이 매번 방희龐羲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격파했다. 장로의 부곡部曲 다수가 파서巴西에 있었기에 방희를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삼아 병력을 거느리고 장로를 막도록 했다. [영웅기英雄記: “방희와 유장은 친구인데다 유장의 여러 아들을 곤란에서 구해준 까닭에 유장이 방희에게 덕을 베풀었고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결국 권세를 독점하게 했다.”] 훗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