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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의친왕은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여성과의 염문설에 그 때문에 미국인 청년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궁과 첩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부인 1인, 후궁 7인, 첩 8인이라고...(기준을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군주제 시대에는 달리 봐야 한다"라고. 하지만 "근대"다. 근대에는 그것을 "축첩(쌓을 축, 첩 첩)"이라고 부른다. 의친왕은 일제강점기 막판까지 후궁인지 첩인지 늘려나갔다. (일관성은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과, 여기에 더해 기생까지 - 어떤 자료에는 일본인 첩도 있었다고.) 어떤 이는 의친왕이 축첩을 15세기 세종에 비교하며 왕실의 여성편력은 다르다고 강변한다. 어불성설이다. 세종의 시대를 우리는 중세, 또는 근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친왕이 살던 시대는 20세..

고종황제의 한 후손은 오늘 고종 독살설을 주장하며 고종 독살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몰상식"하다고 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포스팅할 시간이 없는데, 글쓰기를 자극한다.) 그럼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확인하며 과연 상식이 결여된 자는 누구인가 확인해보고자 한다. 앞서 고종의 죽음을 지켜본 의사들의 증언을 포스팅한 바 있다.(여기에 참여한 의사 중 1인은 조선인으로 그는 전직 의친왕 이강이 신임했던 자다.) 그들에 따르면 고종은 전형적인 뇌출혈 증상이었다. 그럼에도 고종의 독살설이 회자되는 것은 첫 번째로는 일제의 잔악함을 강조하고자, 또는 그들이라면 응당 그랬으려니 하는 확신과 두 번째로는 여기에 더해 윤치호 일기(그가 들은 이야기)가 그 추측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그는 황족 이강과 이준용..

*고종이 "을사조약의 폐기에 일도 노력하지 않았다"는 저의 착오가 있어 원고를 수정해 게재합니다. 고종 또는 순종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믿을 수 없는 자료로 치부한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막대한 1차 사료가 있다며 그것을 번역하면 고종과 순종에 대한 재조명이라도 벌어질 듯 내심 기대한다. 그 1차 사료 가운데 하나가 승정원일기다. 나무위키 승정원일기 항목에는 그런 희망이 그대로 담겨있다.“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을사늑약 체결 열흘 뒤인 광무9년(1905) 11월 27일,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올린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에 사로잡혀 망령되게 저희들의 생각을 아뢰고 모여..

어떤 이들은 의화군, 훗날 의친왕 이강이 미국에서 유학생과 한국 독립의 뜻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강의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사 역시 이강의 미국 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 Richmond Dispatch, January 22, 1902.에 실린 글이다. (정병준 선생님 논문의 각주를 보고 원문을 확인, 번역해 싣는다.)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필독하시기 바란다. 1902년이 대한제국에게 어떤 기간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왕자, "흥청망청"뉴욕 관광에 3만불을, 은행에 고소당한 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뉴욕 월드의 워싱턴 특파원) 한국 국왕의 차남인 의화(Euiwha)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아름..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2.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편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은 고종황제로부터 칙명을 받고 대한적십자사 재에 취임하여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서양식 의료체제를 한국에 적극 도입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역시 해외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이준,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고종은 어떤 군주인가? 매스미디어에서는 얼치기 작가, PD들이 고종을 미화하고, 또 모 전직 대학 교수는 종교를 믿듯 고종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력과 자기 복제로 각주 달며 찬양고무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많은 사람은 고종을 근대군주, 혹은 시대의 한계로 주저앉은 애석한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의 치세를 돌아보면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강력한 군권으로 제 멋대로 하다가 망국의 길을 연 군주이며, 근대의 물산을 좋아하면서도 전근대의 군주권을 휘두르고자 했던 자다. 고종의 진면목은 그가 신하를 대할 때 드러났으니, 이 방면에서만큼은 사악하리만큼 악독했다. 자신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하를 헌 신짝 버리듯 했다. 그 일례가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이다. 고종은 이상한 냄새에 마시진 않았으나 별생각 없..

우리는 으레 희망을 담아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 희망을 오래 품다 보면 마치 사실인 양 생각하며 되려 진실은 보지 않으려 한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제국 황실가문이 그 대표적 예 중 하나다. 인현왕후가 출궁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만 정작 당신의 조상은 보릿고개를 걱정했을 거다.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망한 재벌을 걱정하는 게 우리네 인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스미디어가 근거 하나 없이 고종이나 민비, 의친왕, 덕혜옹주의 독립운동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면 또 이를 본 이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그리고 몰랐던 역사를 발견한 듯 달려든다. 가끔은 이런 경우가 국제적 개망신으로 치닫게 되기도 하니,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인조이재팬 쪽팔림 사..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일기를 읽다가 경술국치 전 며칠간을 살펴봤다. 온갖 야설에는 황제의 뜻이 아니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지만, 나라의 멸망 앞에서 고종과 순종은 무사태평했다. 데라우치조차도 한 나라의 몰락에 "아아"라 했으나, 두 명의 암군은 평온 무사하게 자기 나라의 멸망을 지켜봤다. 또한 이완용 등 악질 친일파가 끝까지 협상에서 놓치 않았던 것은 국호와 "왕호"였다. 즉 이 병합의 주역들은 나라에는 역적이었지만 황실에겐 충신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내 이왕가가 친일파들과 함께 쿵짝쿵짝했던 까닭을 보여준다. 이들 덕분에 황실 가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황실에 편입되어 왕공족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또 순종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1910년 8월) 1..

윤자형은 “대한제국기 때, 선전관 등을 역임하다가 을사조약 이후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원각교를 창시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무신 · 의병장 ·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사적은 내내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88년 성신여자대학교 이현희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자료는 칙서와 칙명 2건인데, 칙서는 잘 보이지 않아 패스하고 칙명을 읽어보았다. 윤자형 칙명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勅命 칙명 正二品嘉義大夫尹滋亨 정이품 가의대부 윤자형 爲義兵大將兼湖南三道 위 의병대장 겸 호남삼도 陸軍大都督者 육군대도독자 開國五百十七年七月十日 개국오백십칠년 칠월 십일 (勅命之寶) (칙명지보 날인) 이 자료를 보고 몇 가지 의문이 들어 부기한다. 1. 가의대부는 문산계 정2품이 아니라 ..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의친왕, 그는 이 땅의 1세대 미국유학생이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카더라"통신이 난무하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둥, 한국인 유학생을 도왔다는 둥 미담은 많지만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출발할 땐 의화궁, 중간에 의친왕이 된 이강은 술에 취해 미국인들과 주먹다짐을 하다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미국 유학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국의 아도니스, 의화군은둔국의 황제로 즉위할 수도 있는 깨어있는 오리엔탈리스트 미국 대학 출신 젊은이의 활기찬 경력꽃으로 뒤덮인 조끼를 갖춘 87벌의 양복, 그리고 미국 여성과 세 번의 연애를 한 영웅 그가 코니 아일랜드에서 즐긴 것그의 예언적인 발언들 로베르투스 러브(Robertus 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