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을 숭모하는 사람들은 1919년 의친왕이 상해 망명 시 진관사를 들렸다고 말한다. 아래는 모 단체 홈페이지의 내용이다. "의친왕은 왕실 원찰 진관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동단의 국내 비밀 지부로 활용하였다. 의친왕은 상해로 망명 당시에도 진관사와 안전 가옥을 들렀다가 근처 수색역에서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제목에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거짓이다. 독립지사 백초월 스님과 의친왕을 엮어보고자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사건이 불발된 후 붙잡혀 온 의친왕(당시 신분은 이강공이었으나 편의상 의친왕으로 함)은 신문조서에서 “북문 밖 최성호의 집”에 있다가 “수색역에 도착, 열차를 탔다”고 했다. 최성호의 집이 있던 북문 밖은 “고양군高陽郡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로 세검정 근처였다. 또한 의친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