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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1905년 2월,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 고종이 자식 문제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를 불렀다. 곧 의화군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시점이었다. 이날의 대화내용은 하야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 전보에 남아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고종이 #의친왕을 신뢰했고 #제국익문사를 맡겼다는 이들이 있지만 의친왕이 고종을 만난 것 몇 번 안되고 주연집 같은 고종의 문집에는 흔적조차 없다. 오죽하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을까. (이것도 "나조차 속았다"할 것인가?) 그럼 자식 이강을 보는 고종의 심정을 들여다보자. 이에 앞서 미리 말해두지만, 의친왕 숭모꾼들은 이 역시 일제에 의해 오염된 사료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본국에 보내는 전문"이며 ..

지난주 원주에서 민긍호 의병대장 기념사업회 발대식이 있었다. 이때 의친왕기념사업회는 고종황제가 민긍호 의병장에게 내린 칙명을 공개했다. 기사 전문은 아래 링크한다. ‘민긍호 의병장 임명’ 대한 황실 밀서 최초 공개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하던 원주진위대 특무장교 민긍호 의병장(1865-1908)을 간부급 의병장으로 임명한 밀서가 공개됐다.민긍호의병대장 기념사업회(회장 조경빈)는 지난 22일www.kado.net칙명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 勅命 / 閔肯鎬特陞正 / 三品通政大夫 / 命鎭衛隊倡義 / 司令部大將者 / 光武十一年九月五日위 칙명을 그대로 해석하면, “칙명 민긍호를 정삼품 통정대부로 특승하고 진위대창의사령부대장을 명한다”라는 뜻이다. 위 칙명에는 문산관(정3품 통정대부)과 실직(진위대..

의친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독립지사들이 의친왕에게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구 등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마자 바로 의친왕을 예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포럼 자료집(2024.6.)에서 이를 활자화했다. 그러나 임정인사들은 그날 숙소에서 기다리던 이승만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문에 기록된 바, 귀국 당일 예방 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전이라면 그 무리에 거짓말쟁이가 있는 거다.)여기에 더해 해방 정국 김규식의 비서로 일했던 송남헌의 관련 기록이 있어 추가한다. 한 단어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언젠가는 이강 공이 삼청장으로 김 박사를 방문했다. 이때 보료 위에 앉아 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일본 이상 당혹스러워했던 건 대한제국 조정이었다. 어떤 자들은 일말의 근거도 없이 안중근이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환상과 조상 현창에 눈먼 이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황태자(영친왕)의 스승이 되어 달라며 태자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이기도 했다. (그 전에 고종은 부디 한국에 남아달라며 간청하기도 했다.) 순종은 태자태사의 죽음에 조서를 내렸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영령(英靈)의 기질을 타고나 광제(匡濟)의 계략을 갖추고서 시운(時運)을 만회하고 문명(文明)을 발전시키려 현로(賢勞)를 꺼리지 않았고 자신의 훌륭함은 돌보지 않은 채 우뚝이 동양(東..

의친왕은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여성과의 염문설에 그 때문에 미국인 청년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궁과 첩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부인 1인, 후궁 7인, 첩 8인이라고...(기준을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군주제 시대에는 달리 봐야 한다"라고. 하지만 "근대"다. 근대에는 그것을 "축첩(쌓을 축, 첩 첩)"이라고 부른다. 의친왕은 일제강점기 막판까지 후궁인지 첩인지 늘려나갔다. (일관성은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과, 여기에 더해 기생까지 - 어떤 자료에는 일본인 첩도 있었다고.) 어떤 이는 의친왕이 축첩을 15세기 세종에 비교하며 왕실의 여성편력은 다르다고 강변한다. 어불성설이다. 세종의 시대를 우리는 중세, 또는 근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친왕이 살던 시대는 20세..

*고종이 "을사조약의 폐기에 일도 노력하지 않았다"는 저의 착오가 있어 원고를 수정해 게재합니다. 고종 또는 순종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믿을 수 없는 자료로 치부한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막대한 1차 사료가 있다며 그것을 번역하면 고종과 순종에 대한 재조명이라도 벌어질 듯 내심 기대한다. 그 1차 사료 가운데 하나가 승정원일기다. 나무위키 승정원일기 항목에는 그런 희망이 그대로 담겨있다.“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을사늑약 체결 열흘 뒤인 광무9년(1905) 11월 27일,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올린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에 사로잡혀 망령되게 저희들의 생각을 아뢰고 모여..

어떤 이들은 의화군, 훗날 의친왕 이강이 미국에서 유학생과 한국 독립의 뜻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강의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사 역시 이강의 미국 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 Richmond Dispatch, January 22, 1902.에 실린 글이다. (정병준 선생님 논문의 각주를 보고 원문을 확인, 번역해 싣는다.)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필독하시기 바란다. 1902년이 대한제국에게 어떤 기간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왕자, "흥청망청"뉴욕 관광에 3만불을, 은행에 고소당한 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뉴욕 월드의 워싱턴 특파원) 한국 국왕의 차남인 의화(Euiwha)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아름..

나무위키는 의친왕 육남 "이곤(李錕, 1919~1984)" 항목에 그가 "릿쇼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래서 영어와 독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도 "릿쇼대학 영문과 졸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1950년대 평화신문은 그가 졸업한 학교가 릿쇼"대학"이 아니라 릿쇼"중학"이라고 언급했다. 이곤(일명 이명길)씨는 4253년(1920) 11월 4일 이강 공의 육남으로서 모친 김씨(이강공의 삼첩三妾)의 몸에서 출생한 후 8세 때에 일본에 도항하여 동경 입회소학교立會小學校를 졸업하고 동경 사립 입정중학교立正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에서 중퇴하였다고 한다. 4271년(1938) 8월에 귀국하여 시내 종로구 견지동 85 사동궁에 거주 시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면 금곡리 XXX..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2.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편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은 고종황제로부터 칙명을 받고 대한적십자사 재에 취임하여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서양식 의료체제를 한국에 적극 도입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역시 해외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이준,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1. 삼성장군 의친왕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육군 3성 장군" 의친왕 편이다. 자료집 첫머리의 의친왕 소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서양 의술을 적극 들여오는 한편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으로 군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 시절을 보자. 고종실록에는 의친왕에게 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