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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조효손祖孝孫은 유주幽州 범양인范陽人이다. 부친 숭유崇儒는 학업으로 이름을 날려 제주장사齊州長史를 역임했다. 효손은 박학하고 역산에 밝아 일찍부터 지식과 견문에 통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개황연간(581~600) 종률鍾律이 많이 결실되어 비록 하타何妥・정역鄭譯・소기蘇夔・만보상萬寶常 등 다 같이 토론하고 상의했으나 이리저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강좌江左를 평정한 뒤 진陳의 악관樂官 채자원蔡子元・우보명于普明 등을 얻어 청상서清商署를를 설치했다. 이때 우홍牛弘이 태상경太常卿이어 효손孝孫을 협률랑協律郎으로 삼아 자원, 보명과 함께 아악雅樂을 참정하게 했다. 이때 다시 진의 양산태수陽山太守 모상毛爽이 경방율법京房律法을 이치를 알아 관을 배치하면 (절기에 맞게) 재가 날아갔고 달의 움직임이 모두 징험에 부합..
당검唐儉은 자가 무약茂約 병주并州 진양인晉陽人이다. 북제北齊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옹邕의 손자다. 부친 감鑒은 수隋의 융주자사戎州刺史였다. 당검은 불우한 환경에 처해 규범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나 부모를 섬김에 효자로 명성을 날렸다. 전에 당감(당검의 부친)이 고조高祖와 친분이 있어 함께 금위禁衞를 지휘했다. 고조가 태원유수로 있을 때 검과 태종은 매우 밀접하게 지냈다. 당검은 태종에게 수의 황실이 혼미하고 흐트러졌으니 가히 천하를 도모할 만하다고 종용하며 설득했다. 태종이 고조에게 아뢰자 불러들여 몰래 세사를 논했다. 당검이 말했다. “명공明公께서는 옥좌에 오르실 귀한 상입니다. 또한 이씨도 도첩에 있지 않습니까. 천하의 향배는 현재의 조정에 있지 않습니다. 관부의 창고를 열어 남쪽의 호걸들에게 손짓하고 북..
오나라의 대신 주연의 무덤이 1984년 중국 안휘성 마안산시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그의 이름이 적힌 목찰이 발견되었다. [사진 참조] 목제로 총 3건으로 장방형이다. 모두 크기가 동일하며 명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정면 꼭대기 끝 중앙에 묵서로 “謁(알)”이라고 쓰고 오른쪽 아래 한 줄로 “[ ]節右軍師左大司馬當陽侯丹陽朱然再拜([ ] 절우군사좌대사 마당양후단양주연재배)”라고 썼다. 자체는 예서와 해서 중간 정도다. 여기에 나오는 주연의 관작은 삼국지 열전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하 그의 열전을 번역, 소개한다. 출전: 三國志 吳書 卷56 朱然傳 子績, pp.1305~1309. 주연朱然은 자가 의봉義封, 주치朱治 누이의 아들로 본래 성은 시씨施氏다. 처음에 처에게 아이가 없어 연이 13세에 손책孫策에..
선주先主(유비) 목황후穆皇后는 진류인陳留人이다. 오빠 오일吳壹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일의 부친은 본디 유언劉焉과 친구였던 까닭에 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언이 다른 뜻을 두고 있던 차에 [한진춘추漢晉春秋: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자 오吳가 손부인孫夫人을 불러들였다. (이때) 부인은 오로 태자太子를 데려가려 했다. 제갈량諸葛亮이 조운趙雲을 시켜 병력을 배치해 강을 막아 태자가 가지 못하게(남아 있게) 하여 제지할 수 있었다.] 관상 잘 보는 이가 태후의 상을 보더니 고귀해 질 것이라 했다. 언이 이때 아들 모瑁에게 들어오라 하여 모의 부인으로 들였다. 모가 죽자 황후는 홀로 지냈다. 선주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자 손부인孫夫人이 오吳로 돌아갔고 여러 군신들이 선주에게 황후를 맞을 것을 권했다. 선주가 유..
조선화론집성은 우현 고유섭(1905~1944)이 조선시대 에서 회화 관련 기록을 간추려 모은 책이다. 저자 생전에는 간행되지 못하고 1965년 황수영이 유족으로부터 원고를 받아 등사 간행했으며, 1976년 경인문화사에서 등사본을 재인쇄하는 방식으로 중간했다. 전적을 일일이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 조선화론집성을 보고 원본 본 양 논문에 각주 단 사람도 많았던 듯하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조선화론집성의 오타를 찾아 여기 나온 걸 누가 어떻게 인용했는지 찾아내고 싶다. 번역이 대접 못받는다고 하지만(그래서인지 "이런 건 왜 번역 안해"라는 사람들, 저서는 내도 번역서는 안내더라.) 사료집성이야말로 공만 많이 들고 얻는 건 별로 없다. 그래서 한국미술사사료집성을 펴낸 진홍섭 선생이야말로 이 분야의 존경을 받아..
고려거란전쟁으로 관심이 높아진 요나라. 신라와 당의 거센 공격으로 동북의 패자였던 고구려가 사라지자 거란은 그 자리를 대신해 이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거란은 몽골초원 동쪽의 주요 세력으로, 한동안은 당과 돌궐 사이에서 힘의 지렛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까닭에, 우리 역사에서 만주를 도려냈다는 점 때문인지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러나 오늘날 국적이나 경계를 구분으로 근대 내셔널리즘을 투영하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온당하지도 한다. 삼국이 소멸할 때 그랬듯, 사람들은 이합집산하며 새로운 사회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소개할 발해 출신 요나라 장수 고모한高模翰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고모한高模翰은 일명 송松으로 발해인渤海人이다. 근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을 ..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전편)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alsdaskind.tistory.com (앞에서 계속) 얼마 후 다시 병사를 이끌고 천산天山에서 구성돌궐九姓突厥을 공격했다. 출발에 임하여 고종이 안에서 갑옷을 꺼내 인귀를 시험했다. 주상이 말했다. “옛날에 활을 잘쏘는 이들은 일곱 겹의 갑옷을 꿰뚫는다 했는데, 경은 다섯 번을 쏘시오.” 인귀가 쏘아 뚫자 고종이 깜짝 놀라 다시 견갑堅甲을 내어 주었다. 이때 구성은 무리가 10여 만이었는데, 싸납고 건장한 이들 수십명이 역으로 와서 도전했다. 인귀가 화살 세 발을 쏘아 세..
성姓은 혈연을 표시한 것이다. 한자 성姓에 여성[女]이 있는 것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던 모계사회의 전통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씨氏는 “신지神祗”로, 본디 천지신명, 즉 하늘과 땅의 여러 신들을 의미한다. 이후 동일 신(앙)을 가진 집단의 수장을 가리키는 존칭이 되었고 다시 각 집단을 대표하는 유력자의 자칭이 되었다. 씨는 ①자신이 분봉받은 나라의 명칭, ②자신이 다스리는 마을의 명칭, ③관직 명칭, ④직업 명칭, ⑤현재 거주지, ⑥왕 또는 제후와의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호칭, ⑦조상 중 특정인의 자字 등에서 기원했고, 이 씨를 가족 구성원 전체가 공유함으로써 성姓처럼 사용하게 되었다.(따라서 과거 어느 시점에는 봉지나 관직이 바뀌면 씨도 이를 따랐다. 즉 동일 가족이어도 다른 씨를 썼다.) 고염무의 ..
뤄전위(또는 나진옥羅振玉)가 정리한 고창국 연표다. 뤄전위는 일본 체재 시절 오타니 탐험대 수집품을 실견할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는 투루판에서 파낸 국씨고창국시대부터 당대까지의 묘전 12건(완형 기준)도 포함되었다. 이는 뤄전위가 고창국 기년을 정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럼 이하 그 서문이다. 고창국씨연표서高昌麴氏年表序 고창高昌의 건국은 북위北魏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멸망은 당唐 초기다. 백성은 염한炎漢(중국인)의 후예이며 그 임금은 서쪽 변경의 호족이다. 비록 개창하고 30년간 (임금의) 성이 세 번 바뀌었으나 (왕통이) 국씨麴氏에게 돌아가고부터 안으로는 문화와 교육을 진작하고 밖으로는 열강을 섬겨, 중원은 안정되지 못하고 해내는 분열되었던 때였건만, 서쪽 사람들은 도리어 소강小康 시대를 열..
칠세七世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에 “고조高祖는 양凉(서량) 무소왕武昭王 고暠의 7대손이다. 고는 흠歆을 낳고 흠은 중이重耳를 낳았다. 중이는 희熙를 낳고 희는 천석天錫을 낳았다. 황조皇祖의 휘는 호虎고 황고皇考의 휘는 병昞이다.”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에서는 “칠세조는 고暠이며 고는 흠을 낳았다.”고 했다. 천석 이하 바로 호를 낳았다고 하고 호는 병을 낳고 병은 고조를 낳았다 했으나 황조, 황고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구劉昫는 당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신당서 본기에선 다시 천석을 '천사天賜'로 고쳤다. 칠대조이든 칠세손이든 모두 자신에서부터 세는 것으로 순서대로 추산하면 고부터 병까지, 역으로 추산하면 병부터 고까지가 칠세다. *참고 이호李暠 – 이흠李歆 – 이중이李重耳 – 이희李熙 – 이천석李天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