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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황손을 자처하는 해괴한 짓“

위는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진오 교수가 국치일 시민 언론 민들레에 쓴 칼럼의 일부다. “우리 황실”, “황손님”하는 치들은 정독하기 바란다. 고종을 비판하거나 의친왕의 추태를 말하면 ”뉴라이트“다, “개인 의견”이다 외면하지만 위 글엔 어떤 표정일지, 다 떠나서 종교 수준의 전근대적이자 비이성적 감상에서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뉴라이트” 운운할 자격은 있는 지. 하긴 몇년 전 세종시 학술행사 보니 저 해괴한 짓에 같이 춤추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출신 댄서들도 있더라. 뭐 계속 하던말던 상관 없으나 가짜 문화재 만들어 사기치는 건 그만 하기를,전문은 아래 링크로, 국치일, 116년 전 그날의 일그러진 초상들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1910년 8월 22일 융희제 앞에서 열린 어전회의에 참..

이왕가 사람들 2026.08.31

독립운동가인줄? 이강 공의 사생활(2회: 1928.10.24.~10.31. 쇼와천황 즉위식 참석)

독립운동가로 분칠한 전직 의친왕 이강공의 1928년 도쿄 여행 이야기 그 두 번째 편이다. 이강은 쇼와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을 이유로 도쿄로 향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이강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그 내용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했다. 보고서 또한 두번째다. 문서 첫장 상단에는 경무국장 날인이 있다. 또한 타원, 원형 2종의 고무인에 따르면 1928년 11월 6일 접수해 11월 8일 결재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은 여행 자유가 박탈 되었다고 말하지만, 모두 조상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에 불과하다. 아무리 덮고 꾸미려 해도 그의 방탕했던 생활은 세상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 상해 망명 기도 실패 이후 경찰 및 검찰의 취조에 총독부 요구대로 응해 별다른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왕가 사람들 2026.08.29

독립운동가인줄? 이강공, 일본 천황 생일 - 천장절 파티에 제일착

의친왕, 이강공, 이강은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은 상해 망명 기도 사건에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 그는 존경할 여지가 일도 없는 인간이다. 상해 망명 기도 사건 때는, 측실을 데리고 가겠다, 고종이 남긴 서류를 가져가겠다 시간을 끌었으며, 붙잡힌 뒤로는 본인은 그저 끌려왔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내가 했소'가 아니라 '당했다', '모른다'며, 이왕직에 대한 불만이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그는 일본인 권력자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국권피탈 전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매달렸고, 식민지가 되고는 역대 총독에게 호소했다. 메이지 천황 사후 데라우치 총독에게 능묘를 참배하고 싶다고 했던 편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다음 매일신보 기사는 총독관저의 천장절 배관식에 참석 예정이란 기..

이왕가 사람들 2026.08.27

오마이뉴스의 가짜 뉴스, 역사 왜곡: "상복 입고 압록강 철교를 넘은 의친왕"

가끔 언론 지면을 보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퍼 나르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소위 전문가들이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자료에 대충 짜깁기해 전문가 행세를 한다. 아래 기사는 바로 그 전형에 해당한다. 상복 입고 압록강 철교를 넘은 의친왕임실 성수산은 '새 나라를 연 창업 군주들의 성지'로 불린다. 성수산 상이암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환희담 설화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삼청동 전설이 깃들어 왕의 기도터로 알려진 곳이다www.ohmynews.com 그럼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대동단 관련 판결문 등 사료 연구에 따르면, 이강(1877~1955)은 고종 황제의 아들로서 1895년에 유럽 6개국을 방문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아들인..

이왕가 사람들 2026.08.25

독립운동가인줄? 이강 공의 사생활(1회: 1928.10.18.~10.23. 쇼와천황 즉위식 참석)

전주 이씨 후손들의 노력과 영국이나 일본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부러움이 의친왕 이강을 독립운동가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말 덧붙이기를 좋아하는 인터넷 언론 "시민기자", 스스로 문연 연구소의 "연구소장" 등은 동시대 자료를 읽을 능력도, 노력도 없이 그저 주워들은 이야기로 낭설을 유포하고 "역사 정립"인양 뿌듯해 한다. 의친왕 이강이 상해망명 시도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망명을 주도했던 것은 대동단원으로, 이강은 여기에 합류했을 뿐이다. 당시의 경찰과 검찰의 신문 조서를 살펴보면, 의친왕 이강은 내내 자신은 끌려왔을 뿐이며, 일신의 불편함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니 선처해 달라고 애걸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서명 "이강"을 남겼다.의친왕 이강, 아니 이강공은 메이지 천황 사후 ..

이왕가 사람들 2026.08.23

(신자료) 황실 독립운동가로 잘못 알려진 이강의 사생활

일본 황실의 의례에는 빠지지 않았던 의친왕 이강은 1928년 11월 10일 교토에서 열린 쇼와 천황 즉위식에도 참석했다. 그는 10월 18일 경성을 떠났다. 본래 일정은 11월 말 돌아오는 것이었으나, 12월 19일 저녁에야 부산에 도착했다. 두 달을 채운 셈이다. 다음 문서는 의친왕 이강이 왜 일정을 늦추었는지 설명해 주는 자료다. 이 역시 의친왕 이강의 은거 전후 사정을 볼 수 있는 경비관계철(이강공비 양 전하 관계)에 포함되어 있다. 본 문서는 국가기록원이 소장 및 온라인 원문공개한 자료로, 표지와 색인, 중복 1건을 제외하면 103건의 문서가 있다. 문서의 작성 시기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다. 이 문서는 그 중 가장 선행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1928년 모월 12일 자 문서다. 문서의 ‘..

이왕가 사람들 2026.08.23

(신자료) 의친왕 이강, 공위를 물려준 이유? 여자 문제!

의친왕 이강의 후손들은 망명 시도 사건이 실패한 이후, 이강공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압송당할 뻔했으며, 결국에는 공위를 빼앗기고 은거를 강제 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기는 커녕 온양, 배천, 하코네, 벳푸 등 조선과 일본의 유명 온천을 두루 찾았다. 한 술 더 떠서 가는 곳마다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이를 후손들은 "압송"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과연 이강은 왜 공위를 내려놓은 것일까. 이강이 공위를 아들 이건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은거를 둘러싼 전후 조치를 알 수 있는 문서를 확인했다. 이 역시 지난번 신 자료를 알려주신 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다음 자료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보관하고 있던 경비관계철(이강..

이왕가 사람들 2026.08.18

(신자료) 의친왕, 이강공 러시아 여성과 추문

의친왕 이강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미국 청년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고 학교를 그만 다닐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의 저택 사동궁에는 정실 부인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이 함께 살았다. 또한 첩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의 후손들은 이 모든 것이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기생을 태우고 온 인력거꾼이 모두 독립군이었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그러면 인력거꾼과 만나면 될 일이지 꼭 기생들과 운우지정까지 나눠야 했을 지 의문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역사왜곡이자 독립지사들에 대한 모독이다. 최근 어느 분께서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셔서 자료를 읽고 있다. 나름 이야기가 될 듯하여 욕심 내어 논문으로 발표해 보려다가, 광복절 여러 논란..

이왕가 사람들 2026.08.17

일자무식, 애첩의 조카에게 군수 벼슬을 줬던 대한제국 관료 이건하

대한제국 관원 가운데 이건하(李乾夏, 1835~1913)라는 자가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및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국인을 구타한 외국인의 처벌을 요구하고, 울릉도에 들어와 허가 범위 이상의 벌채를 했던 일본인 벌목업자들을 돌려보내고, 간도 체류 한국인에게 변발과 호복을 착용하라는 청에 철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청구 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도 상소를 올렸다. 특히 인척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가담했음에 분노했다. 종친 이건하 씨는 이번 신조약 사건에 대해 종사가 몰락하여 사라지게 생긴 것에 분통해하며 울분을 토하며 그 자식과..

이왕가 사람들 2026.08.17

의친왕과 안상호 - 하영 가족을 위한 변명

일요신문은 최근 단독 특종이라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하영 증조부 안상호, ‘명성황후 시해’ 한국인 가담자 소개로 결혼”(2026.08.14. 14:29:14)이 타이틀만 보면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했던 구연수(具然壽, 1867~1925)가 두 사람을 중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상호의 자술에 따르면 구연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 의친왕 저택에서 만난 것은 맞지만, 직접 이소코의 집에 찾아가 모친으로부터 혼인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 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더라. 그 때에 씨의 부인 기자(磯子)와 서로 알게 되어 기자 부인의 모친에게 청혼하여 전후 열한 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하략) [매일신보 1918.12.10.]기사 내용도 자..

이왕가 사람들 202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