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34

일본군 육군 중장 전 의친왕 이강

대한제국 시대 의친왕 이강은 친왕으로서 육군부장 찬모관을 역임했다. 대한제국의 장성으로 그가 수행한 대표적인 일은 러일전쟁 승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것이다. 그리고 군대 해산 시에는 하루 전 일본으로 피서를 떠났다. 1919년 상해망명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애당초 일본은 이강공을 일본으로 보내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마음을 바꿔 조선에 두고 감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본이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나 단서는 이강공이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들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이강을 조선주둔군, 즉 "조선군"에 배속시켰다. 이에 의친왕 이강은 일본군 중장으로서 조선군사령부에 부임한다. 다음은 해당 기사다. 이강공 전하 등청금일 오후 2시경 정복을 입으시고 처음 등청하심.이번에 조선군사령부로 부..

이왕가 사람들 2025.07.14

의친왕 이강 숭배자들의 위키백과 오염 시도

며칠 전 의친왕 이강의 숭배자들이 위키백과의 의친왕 항목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금방 복구되었지만. 글을 고치려던 이는 본인의 의도를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다분히 황실이나 의친왕을 비하할 목적을 가지고 위키백과를 훼손해서는 안된다. 개인 감정과 역사관은 배제하고, 독자로 하여금 본인 주장대로 생각하게끔 서술을 해선 안되며, 일제강점기 일제 기록만을 정설이라 하고 구술사를 허구라 하는 것은 다분한 의도에 의한 서술이다."그럴 듯해 보이는 말, 실은 어불성설1. 다분히 황실이나 의친왕을 비하할 목적을 가지고? 이 블로그에서 의친왕 이강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 건, 이강을 숭배하는 무리가 위키백과나 나무위키를 오염시켜 가며 의친왕을 마치 "독립지사"인냥 과대 포장하고 있어서, 게다가 다른..

이왕가 사람들 2025.07.13

의화궁, 국유지를 일본인에게 임대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교수는 논문 "상해 임시정부와 의친왕: 구황실 조항과 의친왕의 ‘탈국’ 사건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에서 “의친왕 이강 공은 항일의식이 강하여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황실 인사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인물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정작 의친왕의 행적을 보면 그랬을까 싶다. 반일의식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치일 이전까지 그에게서 어떤 반일행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의친왕은 개인사 문제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매달렸으며, 일본 유학 중엔 방탕한 생활로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빚쟁이가한국까지 따라오자 고종을 속여 더 많은 돈을 받아냈다. 일본 기록은 일본에 호감이 있다고도 했다. 어쨌든 오늘 자료 역시 흥미로운 자료다. 이하 의화궁은 의친왕을 말한..

이왕가 사람들 2025.07.10

타이베이의 남문, 여정문

1993년 타이베이에 왔을 때는 북문만 눈에 들어왔는데, 이번 타이완 여행에서도 시간이 나지 않아 남문만 보고 왔다. 남문의 이름은 여정문. 도로 한 중간에 있어 도무지 접근할 방법이 없으나 무단횡단으로 성문 권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제강점기(타이완에서는 일치시기日治時期라고 한다) 타이완총독부는 타이베이 성 성벽을 철거하고 4개의 성문을 남겨 사적으로 지정했다. 타이베이 성문에 대해서는 사적조사보고(제이집)(타이완총독부 내무국, 1936.)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지하철 중정기념당역에서 도보 3분이니 중정기념당에 가시는 분들은 잠깐 가까이 가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타이베이성(臺北城)은 현재 타이베이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따다오청(大稻埕)과 남쪽의 위좡(雨庄)과 경계를 이루고, ..

세상 둘러보기 2025.07.09

의친왕 망명 시 진관사를 들렸다는 거짓말

의친왕을 숭모하는 사람들은 1919년 의친왕이 상해 망명 시 진관사를 들렸다고 말한다. 아래는 모 단체 홈페이지의 내용이다. "의친왕은 왕실 원찰 진관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동단의 국내 비밀 지부로 활용하였다. 의친왕은 상해로 망명 당시에도 진관사와 안전 가옥을 들렀다가 근처 수색역에서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제목에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거짓이다. 독립지사 백초월 스님과 의친왕을 엮어보고자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사건이 불발된 후 붙잡혀 온 의친왕(당시 신분은 이강공이었으나 편의상 의친왕으로 함)은 신문조서에서 “북문 밖 최성호의 집”에 있다가 “수색역에 도착, 열차를 탔다”고 했다. 최성호의 집이 있던 북문 밖은 “고양군高陽郡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로 세검정 근처였다. 또한 의친왕에..

이왕가 사람들 2025.07.06

방명록에 답합니다.

수인당(의친왕 측실) 후손을 자처하는 분께서 이 블로그 망명록에 나를 식민사관에 물든, 식민지청산에 실패한 결과라며 글을 남겼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글에서 왜곡이 무엇인가요?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차 언급했듯 납득할 수 있음 글 내리겠습니다. 사과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퉁쳐서 식민지의 적폐란 식으로 비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근거를 제시해주세요. 선동이요? 출처 없는 구전(?), 팩트 조작에 근거한 주장이야 말로 선동입니다. 예를 들면 1909년 거창에서 의친왕 이강이 정태균과 의병 기의를 모의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의친왕은 그 때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요. 또 독립지사 이강 선생의 사적을 도용해 공립협회 주필 운운 의친왕 이강의 사적인냥 포장한 건 의도된 역사 왜곡..

이왕가 사람들 2025.07.05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 남은 전직 의친왕 이강 공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두 조슈번 육군출신 총독이 주도했던 무단통치는 3.1.운동이란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이에 일본은 육군 대신 해군 출신을 선택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다. 사이토는 부임하던 날부터 간담을 쓸어내렸다. 사이토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강우규 의사는 그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1919년부터 1927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문화정치’를 표방, 유화책을 썼다.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한국어 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탄생한 것도 이때다. 1932년 총리가 되었으나 내각의 비리로 1934년 사임한다. 그리고 1936년 2.28. 사건 시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 의..

이왕가 사람들 2025.07.03

의친왕의 벗, 동계고택의 정태균 - 가짜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동계 고택 또는 정온 고택의 "모와某窩"라는 현판은 의친왕이 정태균에게 써준 것이다. 그래서 정태균 집안, 그리고 이강 집안은 이것이 두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자랑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1909년 이강이 거창에 내려가 정태균과 사선대에서 의병을 양성했다고 주장한다. 정부기관 국가유산청의 모 연구사는 몇 년 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홈페이지로 이 내용을 그대로 서비스 중이다. "정온 고택 그리고 정태균과 연관된 인물이 있으니,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1877~1955)이다. 정온 고택에는 의친왕의 친필 ‘모와(某窩)’라는 현판과 고택에서 15㎞ 떨어진 ‘사선대(思璿臺)’ 등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09년 의친왕이 항일 의병활동 모의를 ..

이왕가 사람들 2025.06.21

의친왕기념사업회의 가짜 문화유산

가짜 문화유산은 이제 그만!얼마 전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페이스북 전체 공개의 글에 자신의 소장품 사진을 올렸다. 해당 물건은 차연茶硏 또는 차연자茶碾子라고 하는 것으로 찻잎을 잘게 부수는 도구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사진에 큼지막하게 "황실가전수 전전다례용 연"이라고 썼다. 즉 의친왕 때부터 왕가('황가'는 일종의 참칭이다.)에서 대대로 사용한 것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은제에 부분부분 금도금한 것이 마치 20세기 전반 이왕가 미술품 제작소 제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다. 그것도 중국 당나라 때 물건을 복제한 것이다. 진품은 중국 산시성(섬서성) 푸펑현 법문사 지하궁전 출토품이다. 법문사 지하궁전은 1981년 전탑이 무너지고 이후 복원을 준비하며 1987년 기단 하부를 조사..

이왕가 사람들 2025.05.24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세 한탄한 의친왕 이강

러일전쟁의 승리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경제 정책을 주관한다. 그리고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부임한다. 통감은 대한제국 각부 대신을 소집해 시정 관련 회의를 개최했는데, 현재 회의록이 전한다. 1906년 7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제8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이등박문 외 찬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통역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고쿠부 쇼타로) 등이었다. 이날 열린 회의 안건 가운데 하나가 의친왕 전하였다. 왜? 의병 지원이나 반일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럼 회의록을 보자. 이토 통감: 의친왕義親王이..

이왕가 사람들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