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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후손의 분노, 김건희 종묘 기사를 읽고 - 가장 고종스러운 대통령 윤석열, 가장 윤석열스러운 임금 고종

고종 후손 모씨가 김건희의 종묘 사적 유용을 비판하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김건희의 종묘 유용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종묘는 왕=국가였던 시대 국가 제사가 열렸던 곳이자 문화유산이다. 정신 나간 왕비놀음 한 것이다. 하지만 고종 후손의 이야기도 비판을 면하긴 어렵다. "우리도 돈 내고 들어가는 데" 라든가, "대왕대비도 아니고", "후손에게 허락받았냐"라는 표현은 본인 스스로도 특권 의식을 갖고 종묘를 사묘처럼 생각하기에 나온 표현이다. 왕이 사라진 시대(심지어 나라를 빼앗김), 종묘는 주인은 시민이지 일개 가족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어조는 사고 측면에선 김건희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고종과 윤석열은 닮음꼴이란 사실이다. 윤석열은 고종의 환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

이왕가 사람들 2025.08.29

미국 공사 알렌과 의친왕의 달러빚

얼마 전 모 언론사에서 발행인 칼럼으로 "의친왕의 독립운동" 운운을 보았다. 그는 "그들(일제)의 공문서, 신문기사 따위를 근거로 의친왕을 평가하는 것은 결국 침략자의 시선에 종속된 역사 해석"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대한제국의 기록을 살펴본다. 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사실보다는 믿음으로 의친왕을 바라보고 신봉하는 이들에겐 그저 "단편적"이라 할테지만. 의친왕이 미국 유학 시절, 화려한 레이스의 셔츠를 구입해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로 놀러다니다가 결국 1902년 미국은행에 진 빚을 갚지 못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아래 링크 참조) 돈을 물 쓰듯 쓰다 채권 은행에 피소되었고, 이어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럼 당당했던 대한제국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자. 이 모든 것은..

이왕가 사람들 2025.08.25

경운박물관의 가짜 전시, 의친왕 서예 작품 "언어言語"

2022년 서울특별시 소재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은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기억"이란 특별전을 개최했다. 이때 출품된 작품 가운데, 의친왕 서예라고 하는 10폭 병풍이 있다. 작품 사진은 아래와 같다. 사진은 도록에 게재된 순서(한문이기에, 우-좌, 상-하)대로 배열한 것이다. (아래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부여했다.)경운박물관은 이 자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보를 소개했다. 의화군 10폭 병풍 19세기말 종이에 먹 화폭 26.5cm 세로 78.4cm 의친왕기념사업회 소장 / 의친왕이 어린 시절 직접 쓴 병풍이다.경운박물관은 이 글씨를 의친왕이 직접 썼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틀렸다. 5번을 보자. 여기 말미에 '임신壬申 하夏'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을 쓴 시점이 임신년 여름이라는 것..

이왕가 사람들 2025.08.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강 공 서예 작품 "즉사卽事"

이강 글씨시대: 20세기(1910~1930 사이) 크기: 가로 31.0cm, 세로 129.0cm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홍산 480) 의친왕 이강의 행서 작품으로 말미에 자신의 작호, “李堈公(이강공)”을 섰다. 우측 상단에 주문방인 “欣然與心會(흔연여심회)” 1과, 좌측 하단에 백문방인 “晩悟餘事(만오여사)”, 주문방인 “李剛之印(이강지인)”을 찍었다. 흔연여심회는 송대의 문인 조보지晁補之의 중 한 구절로 “기쁘게 한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동일한 구성의 낙관을 찍은 작품 가운데 정사년(1917) 작이 있어 이것 역시 그 시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조선 전기의 문인 유방선柳方善(1388~1443)의 칠언절구, 즉사卽事로 동문선東文選 권22에 실려 있다. 동문선 수록 시가 몇 점 있는 것을..

이왕가 사람들 2025.08.17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강 공 서예 작품 "만성漫成"

의친왕 이강 필 행서시고시대: 20세기 크기: 세로(장황 포함) 143.3cm, 가로(장황 포함) 39.6cm, 축 길이 56.1cm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고궁 50)의친왕 이강의 행초서 작품으로 말미에 자신의 호, “晩悟(만오)”를 섰다. 우측 상단에 주문방인 “欣然與心會(흔연여심회)” 1과, 좌측 하단에 백문방인 “晩悟餘事(만오여사)”, 주문방인 “李剛之印(이강지인)”을 찍었다. 흔연여심회는 송대의 문인 조보지晁補之의 중 한 구절로 “기쁘게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동일한 구성의 낙관을 찍은 작품 가운데 정사년(1917) 작이 있어 이것 역시 그 시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고려시대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만성漫成 가운데 두 번째 수다. 동문선東文選 권19에 실려 있다. 원문과 역문은..

이왕가 사람들 2025.08.17

(한서) 반고, 효평제를 찬하다.

효평제 재위 기간 정치는 왕망에게서 나왔다. 선을 기리고 공을 드러내 자신을 널리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 문장을 살펴보면 변경의 이민족이 반항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①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고 칭송하는 소리가 나왔다.② 그러나 위로는 변괴가 일어나고 아래로는 백성의 원망을 품자 왕망 역시 글로 이를 감출 순 없었다.③ ① 사고師古가 말했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 시에 이르길, “동(서)쪽에서 서(동)쪽에서, 남쪽에서 북쪽에서 반항할 마음을 품지 않았다” 무왕武王 호경鎬京에서 벽옹辟雍의 예를 행할 때 사방에서 찾아온 이들이 모두 그 덕화에 감화되어 마음 속부터 귀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인용해 칭송한 것이다.] ② 사고師古가 말했다. ‘휴休, 는 아름답다는 뜻이고 징徵은 징험..

오늘의 고전 2025.08.16

(한서) 반고, 왕망을 평가하다.

찬하기를, 왕망은 외척에서 출발해 검소하고 착실하게 행동해 명예를 얻고자 했다. 일족은 효성스럽다고 여겼고 스승과 벗들은 인자하다고 평했다. 보정의 자리에 올라 성제와 애제 사이에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쓰고 곧은길로 나갔기에 하는 일마다 칭송을 받았다. 어찌 ‘집에서도 들리고 나라에서도 들린다’고 했거늘 ‘겉은 어진 듯하나 행동은 어긋났던’ 것인가? 왕망은 진작에 어질지 못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였기에 사대에 쌓은 권력을 바탕으로 한나라의 국운이 쇠해 국통이 세 번 끊겨 황후가 일족의 어른이 된 것을 기화로 멋대로 간악한 행동을 일삼으며 권력을 찬탈하는 화를 일으켰다. 이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하늘이 내린 시기였을 뿐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제위를 찬탈해 황제가 되자 본디 있어야 할 자리가 아..

오늘의 고전 2025.08.15

제2차 독립선언서(대동단선언), 전협과 최익환을 기리며

3.1.운동 직후 독립운동 세력에는 공화파와 복벽파 두 흐름이 있었다. 전자는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체가 공화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대한제국의 복원을 주장했다.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 대다수는 공화정을 지향했다. 그러나 500년을 존속했던 왕정(또는 제정)의 익숙함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아서 결국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문을 포함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오갔다. 복벽파는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왕실 또는 대한제국 고관의 망명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김가진의 탈출과, 이강공 망명 기도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강공 망명 기도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여러 족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로..

이왕가 사람들 2025.08.15

황족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 이강, 사이토 총독에게 애원하다.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적이 없다. 의친왕 망명사건의 기획자는 전협이지 이강이 아니다. 이강은 출발 전 돈을 확인했고, 측실의 동행을 요구했다. 이는 천하에 다 알려진 일이다. 주동자는 아니었다 해도 그가 동행을 결심한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전후 그의 삶을 살펴보면 “독립운동가”로 사회적 존경받을 만한 인물인지는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방탕하고 무절제했으며, 본인의 행적에 변명으로 일관했다. 예전 자료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나오기에 여기 소개한다. 이강이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만 밝힐까하다가 해당 부분 전체를 소개한다. (출처: 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한길사, 1980, pp.176-177)일본정부는 한때 이강의 국외탈출사건에 제재를 하려 했으나 독립운동을 자극할까 두..

이왕가 사람들 2025.08.13

왕공족 일본 육군 중장 의친왕 이강, 진급에 실패하다

본인의 처우에 대한 분노, 이왕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찼던 전직 의친왕 이강 공은 전협 등 대동단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국 안동역에서 체포되면서 실패했다. 서울로 잡혀온 그는 어떻게든 납치로 분식해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노력했고, 그 덕택에 일제는 뜻했던 대로, 즉 왕공족은 건드리지 않고 독립지사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후 이강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후손들은 주장하지만, 이강이 일본에 가서 장기 체재한 건 한참 뒤인 1930년대이며, 또한 끌려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아마도 일본은 이 좌충우돌의 왕공족을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던 듯싶다. 그래서 지위와 돈, X 등, 그가 갈망하는 것을 일정 부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병..

이왕가 사람들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