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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의친왕 이강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를 하나씩 소개한다. 아래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론인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1871-1915)의 비망록 의 기록이다. 엄비가 싫어했던 두 사람, 의친왕과 이토 히로부미다. 알고 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깊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영친왕뿐 아니라 의친왕도 부탁했다. 의친왕은 이토 히로부미 사후 통감부로 조문을 갔다. 여하튼 의화군(궁), 의친왕, 이강공의 기록을 차근히 모아보려 한다. 참고로 의화궁이라고 하지만 의화궁주, 또는 사동궁주라는 말은 없다. "궁주宮主"는 본디 여성의 봉호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그런 단어도 만들어 쓰곤 한다.조선의 소요도 여하튼 일단락되었다. 신문지상의 보도로 멀찌감치 바라만 봐서인지 명료하지 않아 두셋 조선통의 이야기..

의친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독립지사들이 의친왕에게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구 등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마자 바로 의친왕을 예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포럼 자료집(2024.6.)에서 이를 활자화했다. 그러나 임정인사들은 그날 숙소에서 기다리던 이승만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문에 기록된 바, 귀국 당일 예방 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전이라면 그 무리에 거짓말쟁이가 있는 거다.)여기에 더해 해방 정국 김규식의 비서로 일했던 송남헌의 관련 기록이 있어 추가한다. 한 단어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언젠가는 이강 공이 삼청장으로 김 박사를 방문했다. 이때 보료 위에 앉아 있..

조선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육상(육군상)을 겸하고 있어 자주 조선과 일본을 오갔다. 1911년 5월 데라우치 귀임 소식에 융희제(순종, 이왕)는 직접 찾아가 치하했다. (예전 일본 황태자가 왔을 때도 황제로서 제물포까지 나갔던 바라...) 이와 더불어 일본을 향해 일본어에 진심이었던 순종비 윤씨(순정효황후), 그리고 강점 이후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주색에 탐닉했던 이희 공, 이강 공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일면이 아닐까. 다니엘 튜더가 얼마 전에 이왕실과 관련해 책을 썼다던데, 이런 자료까지 다 봤는지 모르겠다. 후손들로부터 나온 일방의 구전만 듣지는 않았길 바란다. 여하튼 이런 황실의 모습을 미주 한인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는 "추태"로 일갈했다. 이에 이 글을 소..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개최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11월 23일 김구와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사동궁에 의친왕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을 요청하였고, 의친왕은 이를 수락하였고 운현궁 양관을 한국독립당 당사로 사용하고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하였다. 1947년 3월~1949년 8월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을 역임하였으나, 이외에는 일부러 적극적인 정치참여나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피했다.의친왕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까지 황실, 또는 의친왕이 ..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황실 아래로 편입되었다. 고종은 이태왕을, 순종은 이왕을, 그리고 이하 일가는 대한제국 황제의 친족관계, 구 지위에 따라 공 이하 작위를 받았다. 의친왕은 여러 서예 작품을 남기며 말미 관지에 "춘암 이강", "이강공", "의왕 이강" 등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이중 "의왕"은 대한제국 시대의 봉작이었던 만큼, 더러 그 자체로 항일이나 저항, 또는 대한제국의 회복 등의 의미가 담겼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효덕전의 망제, 이왕 전하 어친행, 의친왕 전하께도지난 24일은 음력으로 2월 15일이며 또한 고종 태황제의 부묘 길일은 음력으로 21일임으로 별다례別茶禮는 다시 받들지 못하시겠음으로 작일 오전 11시에 창덕궁 효..

"우리나라를 병탄 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 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19.11.20.)에 실린 글이다. 늘 "독립운동가 의친왕"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글이다.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는 체포되고 며칠 뒤 이강 공이 조선총독 사이토(齋藤) 제독에게 전달한 서신이다. 여기서 이강은 이렇게 ..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

사동궁寺洞宮은,대한제국의 의친왕부義親王府,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저(후에 이건李鍵 공저)다. 오늘날 관훈동, 인사동 일대 대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부속 건물 하나만 남아 인사동 관광홍보관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리 되었을까? 어디선가 게재한 글을 읽다보니 대한민국 정부가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 1945년 사동궁을 강탈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 설명은 기본 팩트부터 틀렸다. 1945년은 정부수립 이전으로 이승만은 광복 후 막 귀국한 유력 인사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황실재산처리법은 1954년 9월에서야 제정되었다. 사동궁 지분이 쪼개진 건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복 후 사동궁이 어떻게 해체되었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려 했다 실패했다. 그래서 다른 대한제국 황실 가족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뇌피셜로 증거도 없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덧붙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또 증좌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퍼 나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망명 사건 이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은 이강뿐이다. 망명 실패 이후 그를 망명시키려 했던 인사들의 구명운동은커녕 일제강점기 내내 숨죽이고 살았다. 호기롭게 “내 뜻이오”라는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최소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고종의 뜻”이었다며 고종을 찬양하지만 자신이 보낸 밀사들의 삶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고종의 모습은 잘 모른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나라를 소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