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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고종 또는 순종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믿을 수 없는 자료로 치부한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막대한 1차 사료가 있다며 그것을 번역하면 고종과 순종에 대한 재조명이라도 벌어질 듯 내심 기대한다. 그 1차 사료 가운데 하나가 승정원일기다. 나무위키 승정원일기 항목에는 그런 희망이 그대로 담겨있다.“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을사늑약 체결 열흘 뒤인 광무9년(1905) 11월 27일,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올린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에 사로잡혀 망령되게 저희들의 생각을 아뢰고 모여서 명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헤아려 처리할 것이라는 비답만 내리시고 시원스러운 윤허를 주저..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3.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의친왕이 독립선언을?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요?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의친왕이 서명(?)했다는 "제2독립선언서"의 진실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대동단 독립선언서 사진을 게재하고 아래 설명을 부기했다.“대동단 독립선언서. 일제 치하에서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에서 평민이 되고자 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 33인 중 제일 첫 번째로 ‘의친왕’이 아닌 ‘이강’으로 서명을 한다. 전협, 김가진 등 당대..
여성 선각자 하란사 또는 김란사깊어 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훌륭하게 차린 귀부인이 하녀들의 등불을 따라 스크랜튼 부인의 방을 두드렸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불을 껐다.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나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귀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입학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경향신문 1962.7.2., 대학가의 리창(裏窓), 이화여대(2)]위의 귀부인이 바로 남편의 성을 써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던 여성, 김란사다. 그녀는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첫 미국 학위소지자다. 그녀는 귀국해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여러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우리는 으레 희망을 담아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 희망을 오래 품다 보면 마치 사실인 양 생각하며 되려 진실은 보지 않으려 한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제국 황실가문이 그 대표적 예 중 하나다. 인현왕후가 출궁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만 정작 당신의 조상은 보릿고개를 걱정했을 거다.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망한 재벌을 걱정하는 게 우리네 인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스미디어가 근거 하나 없이 고종이나 민비, 의친왕, 덕혜옹주의 독립운동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면 또 이를 본 이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그리고 몰랐던 역사를 발견한 듯 달려든다. 가끔은 이런 경우가 국제적 개망신으로 치닫게 되기도 하니,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인조이재팬 쪽팔림 사..
전 의친왕 이강 공은 1919년 망명 기도가 실패한 뒤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주장처럼 국내여행이 일절 금지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이강 공은 예전과 같이 이곳 저곳 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송암신정기를 썼던 1928년 음력 8월(양력 9월)에도 개성을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셨다. 이태진은 1927년 "12월부터 의친왕 자신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비(警備, 감시) 대상으로 올라 사회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세종시 자료집, p.93)고 했는데, 사회생활을 금지당한 이강공이 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강 공은 1928년 3월 14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 정무총감을 조선호텔로 초대해 오찬..
조선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육상(육군상)을 겸하고 있어 자주 조선과 일본을 오갔다. 1911년 5월 데라우치 귀임 소식에 융희제(순종, 이왕)는 직접 찾아가 치하했다. (예전 일본 황태자가 왔을 때도 황제로서 제물포까지 나갔던 바라...) 이와 더불어 일본을 향해 일본어에 진심이었던 순종비 윤씨(순정효황후), 그리고 강점 이후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주색에 탐닉했던 이희 공, 이강 공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일면이 아닐까. 다니엘 튜더가 얼마 전에 이왕실과 관련해 책을 썼다던데, 이런 자료까지 다 봤는지 모르겠다. 후손들로부터 나온 일방의 구전만 듣지는 않았길 바란다. 여하튼 이런 황실의 모습을 미주 한인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는 "추태"로 일갈했다. 이에 이 글을 소..
#마지막왕녀 #이혜경 #의친왕 #역사왜곡 #안창호 #공립협회 #독립운동"마지막 왕녀" 이해경 여사는 의친왕의 딸(5녀)로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사서로 근무할 때 부친 이강 공의 독립운동 기록을 발견하고, 이후로 계속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국내에서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란 저서를 출간해 그 일부를 소개한 바 있다. 지난 광복절(2024.8.15.) 뉴욕 한인회는 여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했고, 또 이를 계기로 여사가 발굴한 의친왕의 행적이 다시 언론 지면에 회자되고 있다. 그중 하루 앞두고 작성된 미주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미국 유학길에서 시작된 김규식, 안창호와의 인연 1877년 고종이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 유..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최근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행사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행사의 주요 요지 가운데 하나는 세종시에 거주했던 김재식의 독립운동 활동을 규명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해 세종시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근거지, 세종"을 주제로 사적지를 조성해 보겠다는 목적도 겸하고 있다. 이 행사에서는 세종특별자치시 최민호 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더불어 국가보훈부 이희완 차관,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축사를 했다. 이번 행사는 당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었고, 향후 사적지 조성 사업까지 함께 한다면 더 많은 세금이 투입될 터다. 일제의 강점에서 일신을 다 바쳐 노력한 독립운동에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런 만큼 독립운동 서훈 지정 여부는 엄격해야 한다. 독립운동..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요즘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동네 역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가야사 지원 방침엔 경주를 제외한 삼남이 모두 가야라고 외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불과 몇 년 유지되었던 후백제를 기념하겠다며 고답적인 학술행사를 연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그런 행사, 기껏 예산 투입해서 해봐야 오히려 근본 없는 동네 밑천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적지 조성해봐야 그 누구 찾아오지 않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느 지역 어디나 사람의 숨결이 있었던 곳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할 텐데, 이야기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니 국가체(정치집단의 중심지)나 독립운동과 같은 기존 흐름에 얹어내려 하다 이 꼴을 못 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종시다. "독립운동 이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따라서 검..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