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독립운동 했다던 의친왕 이강의 친일 유묵, 그의 서예 작품 본문
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83만원)을 받았다. 또한 증빙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상해망명 기도 역시 첩을 데리고 가겠다는 둥, 돈은 준비되었냐는 둥 하며 시간을 끌어 결국 붙잡히는데 기여했다. (잡히고 나서 꼬리자르기 했던 일은 아버지 고종과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 특성 상 증거가 남지 않아"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직간접적 친일행적이나 주색에 매몰된 방탕한 생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불리한 자료는 조작이나 못믿을 이야기라며 눈을 돌리고 증거를 제시하면 식민사관 운운하며 프레임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정작 "황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以膠投漆中(이교투칠중)"
이 말을 해석하면,
아교를 칠 속에 넣는다
는 뜻으로 중국 남조 양나라의 소명세자가 엮은 역대 명문 선집인 문선 文選에 실린 고시 古詩19수 중 한 구절이다. 시의 제목은 "손님이 멀리서 찾아오니(客從遠方來)"다. 옆에 서명 '李堈(이강)'이라고 썼다. 왼쪽 위에는 오른쪽 아래는 주문방인 "晩悟(만오)"를 찍었다.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손님이 멀리서 찾아와
내게 남겨 준 비단 한 조각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벗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원앙 한 쌍을 수놓아
사랑의 이불을 재봉하니
속은 오랜 그리움을 채우고
가장자리는 풀리지 않게 엮었다.
아교를 칠 속에 넣었으니
누가 떼어 놓을 수 있으랴.
客從遠方來 遺我一端綺
相去萬餘里 故人心尙爾
文采雙鴛鴦 裁爲合歡被
著以長相思 緣以結不解
以膠投漆中 誰能別離此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연인을 노래한 시다. 그럼 이 글씨는 어디에 실린 걸까? 이강의 글씨를 싣고 있는 이 책의 이름은 “日本之朝鮮(일본지조선)” 즉 "일본의 조선"이다. 일본의 출판사 유라쿠샤(有樂社)가 1911년 1월에 발간한 책이다. 이름에서도 느낌이 팍 오겠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기념으로 만든 책자다. 일본 메이지 천황은 "四海兄弟(사해형제)"란 글을 올렸다. 뒤에는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을 위시한 일본인 관료들과 대한제국 협력자들의 축하 글(題字)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하나가 됨(?)을 축하하는 글이다. 황족, 독립운동가, 의친왕 이강의 저 글씨의 뜻인 즉, 한국과 일본의 병합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란 거다.
의친왕 경술국치 후, 한국과 일본을 연인에 비유하다.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의친왕이란 사람은 그저 한량이었다. 일제가 작성한 기록에만 그리 나오는 게 아니다. 왕족의 자제로 방탕한 생활에 씀씀이 커 늘 돈에 목말랐고, 글씨 쓰기가 취미로 돋보이고 싶어했고, 그리고 마음 가는 대로 주색을 즐겼던. 딱 거기까지다. 이런 친일행적에 그는 큰 고민 안했을 것이다. 자신의 글씨를 자랑하고 싶어서일뿐. 망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고 애첩을 데리고 가겠다고도 했다. 물론 잡혀와 죄를 받을까 전전긍긍했던 것도.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을 독립운동가라고 포장하다보면 여러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의 바램대로 칠속의 아교처럼 단단히 붙어있었더라면 그의 자손들은 여전히 왕공족의 호사를 누렸을텐데, 우리는 식민으로부터, 그리고 봉건으로부터도 해방했다.
의친왕을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시면 다음을 클릭!
'이왕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친왕-제국익문사-송암 김재식, 세종시의 역사 조작 (0) | 2024.06.30 |
---|---|
의친왕, 소위 황실 후손,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훔치다 (0) | 2024.06.16 |
순종의 유조, 끝까지 찌질했던 대한제국 융희 황제 (0) | 2024.04.20 |
대구광역시 순종 황제 동상 철거 논란 (1) | 2024.04.19 |
의친왕의 전 애첩 '연년이' (1) | 2024.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