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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출전: 山本四郎 編, 『寺内正毅日記-1900~1908』(京都女子大學研究叢刊5)(京都女子大學, 1980), pp.1~6.]○ 1852년(嘉永5) 2월 5일 야마구치(山口) 번사藩士 우타다 마사스케(宇多田正輔)의 삼남으로 출생. 유명幼名은 주사부로(寿三郎)○ 1864년(元治1) 다지히타이(多治比隊)에 입대해 조쿠론도(俗論党)*로 전투에 참가[ *조쿠론도: 바쿠후 반대파]○ 1865년(慶応1) 미타테타이(御楯隊)*에 입대 [ *금문의 변(禁門の変)(1864)에서 패배한 오타 이치노신(太田市之進, 미호리 고스케(御堀耕助)),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 등을 중심으로 결성. 총독은 오타 이치노신, 대사 2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미타지리(三田尻)에 주둔. 같은 해 12월 다카스기 신..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그 틈에 한 몫 잡아보겠다는 자들도 상당했다. 과거에는 명함 한 장 없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유생 대표"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기도 했으니, 그 대표가 이 아래 나오는 송종수(1841生, 서대문 밖 홍파동 866번지 거주)라는 자다.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이 조선에 부임하자 부끄럽기 짝이 없는 환영사를 써서 총독부 돈으로 일본 유람도 다녀왔다. 훗날 1920년에는 순종에게 삼년복상을 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리고도 했고(매일신보 1920.1.21.), 1922년에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받든다며 "부자교父子敎"라는 신흥종교를 창시해 사람들로부터 교비를 갈취했다.(동아일보 1922.10.4.) 세상의 일변에 친일행위를 한 자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먼 훗날 유림의 ..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요즘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동네 역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가야사 지원 방침엔 경주를 제외한 삼남이 모두 가야라고 외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불과 몇 년 유지되었던 후백제를 기념하겠다며 고답적인 학술행사를 연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그런 행사, 기껏 예산 투입해서 해봐야 오히려 근본 없는 동네 밑천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적지 조성해봐야 그 누구 찾아오지 않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느 지역 어디나 사람의 숨결이 있었던 곳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할 텐데, 이야기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니 국가체(정치집단의 중심지)나 독립운동과 같은 기존 흐름에 얹어내려 하다 이 꼴을 못 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종시다. "독립운동 이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따라서 검..
윤자형은 “대한제국기 때, 선전관 등을 역임하다가 을사조약 이후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원각교를 창시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무신 · 의병장 ·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사적은 내내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88년 성신여자대학교 이현희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자료는 칙서와 칙명 2건인데, 칙서는 잘 보이지 않아 패스하고 칙명을 읽어보았다. 윤자형 칙명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勅命 칙명 正二品嘉義大夫尹滋亨 정이품 가의대부 윤자형 爲義兵大將兼湖南三道 위 의병대장 겸 호남삼도 陸軍大都督者 육군대도독자 開國五百十七年七月十日 개국오백십칠년 칠월 십일 (勅命之寶) (칙명지보 날인) 이 자료를 보고 몇 가지 의문이 들어 부기한다. 1. 가의대부는 문산계 정2품이 아니라 ..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서화가들의 작품공모전이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시작되어 1944년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관전과 달리 서예부가 있었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대회는 심사위원 다수가 일본의 관전 출신으로 일본 미술이 조선 미술에 영향을 끼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재조선 일본인이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는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영향에 물들게 했지만, 실은 제전의 더 큰 목적은 민족(조선인과 일본인)이 아니라 지역(식민지와 본국)의 균질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매일신보 1924년 5월 25일자에는 제3회 선전을 준비하며 작품을 옮기는 사진이 있..
현대일보 1946년 7월 12일자에 실린 기사다. 글을 쓴 이강국李康國(1906~1956?)은 양주 출신으로 1925년 보성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고유섭도 보성고등학교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함께 지낸 시간만큼이나 친분도 돈독했던 듯하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 중 공산주의 이론에 입문하고 1928년 중퇴해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철학과에 입학, 독일 공산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귀국 후 파업을 주동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 좌익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미군정 하에서 체포령이 떨어지자 월북했다.(이때 연인 김수임이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서 외무국장, 조선인민군병원장, 조쏘항공사 사장 등을 역임..
서대문구 천연동의 금화초등학교 앞에는 3개의 표석이 있다. 하나는 중군영 터, 하나는 천연정 터, 하나는 청수관 터다. 표석 세 개만으로도 이곳에 많은 이야기가 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연못이 있던 자리금화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본디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모화관 남쪽에 연못을 조성하라는 조선 태종의 지시에 따라 1408년에 판 것이다. 궁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지西池’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 외에도 남대문 밖의 남지南池, 동대문 밖의 동지東池가 있었는데, 모두 연꽃이 만발했다. 그래서 그 해 어느 연못의 연꽃이 활짝 피는가에 따라 정권의 향방이 달라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서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서인이, 남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남인이 득세했다는. 또 ‘반송지..
직박구리는 참새목 직박구리과 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에 서식한다. 야산이나 공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텃새처럼 보이지만 이동하는 아이들도 있어 중국 남부 해안에서 겨울을 나기도 한다. 몸길이는 28cm 전후로 날렵한 체형을 가졌다. 깃털은 회갈색이나 회색에 가깝다. 갈색 깃털도 섞여 있지만 종달새 같은 갈색은 아니다. 머리 깃털이 올라와 있어 종달새로 착각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종달새는 흥분했을 때만 머리 깃을 세운다고 한다. 막 자고 일어나 머리가 뜬 아이처럼 귀엽다. 잡식성으로 잠자리, 말벌, 과일, 곡식 등을 먹는다. 겁이 많아 가까이 오진 않지만 더러 공원에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음식을 먹기도 한다.(빵, 과자 이런 것들) 5~6월이 산란기로 대략 4~5개 정도 알을 낳는다. 일본어로는 ..
서대문구 영천시장, 서울 도심의 대표 시장이다. 사직터널 너머 금천시장, 통인시장도 유명했으나 두 군데는 이미 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고 먹거리 타운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영천시장에는 초입의 야채, 채소가게를 필두로 닭강정, 건어물, 어물전, 잡화점, 뎀뿌라 어묵, 꽈배기, 떡볶이, 전집, 김치, 반찬가게 등등 우리가 시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또한 최근 백 년 가게로 지정된 순댓국집, 베트남 부부가 하는 쌀국숫집을 비롯해 줄 서서 먹는 맛집도 여럿 있다. 그 일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1984년 7월 6일 아침 8시 10분 분주히 장사를 준비할 시간, 영천기름집(주인 박■■, 46) 점포 안에서 가게에 놀러 왔던 권■■ 씨(36, 용산구)가 진열대 위에서 쇼핑백을 발견했다. 한 시간 전 ..
화태청관영 해구신 신품 도착 정기를 보충하고 정력 강장에 신비로운 효과를 가진 전 세계에 유일한 고귀한 실탄 진품이외다. 구해서 복용하길 원하시는 분은 설명서를 요청하시면 무료 증정합니다. / 과연 백발백중 증명서 부산부 초량정 / 합자회사 대양무역사 大洋貿易社 / 전화 1-182번 / 계좌 부산7922번 [매일신보 1938.11.12.] 해구신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했다. 해구-신(海狗腎): 물개의 음경과 고환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 보신 강정제로 쓴다. 해구신은 오래 전부터 강정제로 유명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오로칠상五勞七傷, 신기가 쇠약해지거나 음위에 힘이 없거나 얼굴이 흙빛에 정기가 차거나, 남성의 정력이 쇠약해졌거나, 지나친 성생활로 성기가 피로해져 수척해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