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삼국지) 유장劉璋, 촉을 빼앗기다 본문
삼국지 촉서는 유비劉備를 다룬 선주전先主傳 앞에 유비가 촉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전까지 촉을 다스렸던 유언劉焉과 유장劉璋 부자를 주인공으로 한 유이목전劉二牧傳으로 시작한다. 다음은 그중 유장 부분이다.
유장(劉)璋의 자는 계옥季玉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로張魯가 차츰 교만해셔 유장을 따르지 않자 유장이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을 죽여 서로 원수가 되었다. 유장이 매번 방희龐羲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격파했다. 장로의 부곡部曲 다수가 파서巴西에 있었기에 방희를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삼아 병력을 거느리고 장로를 막도록 했다. [영웅기英雄記: “방희와 유장은 친구인데다 유장의 여러 아들을 곤란에서 구해준 까닭에 유장이 방희에게 덕을 베풀었고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결국 권세를 독점하게 했다.”] 훗날 방희와 유장과의 좋은 관계가 문제가 되어 조위趙韙는 병사를 일으켜 안으로 향했다가 무리가 흩어지고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모두 분별력이 떨어지고 바깥 이야기에 귀기울였던 유장 때문이다.[영웅기英雄記: “앞서 남양南陽, 삼보三輔인 수만 가가 익주로 들어와 그들을 거두어 병사로 삼고 이들을 ‘동주병東州兵’이라고 불렀다. 유장은 성격이 온화하고 위략이 없어 동주인이 옛 백성[舊民]을 침찰해도 유장은 금할 수 없었고 정령도 엉망이어 익주益州의 불만이 깊었다. 조위趙韙가 인심을 얻자 유장이 그에게 위임했다. 조위는 백성의 원한을 기화로 반란을 획책하여 형주荊州에 뇌물을 써서 화의를 청하고 몰래 주의 대성大姓과 함께 거병하여 군대를 돌려 유장을 공격했다. 촉군蜀郡, 광한廣漢, 건위犍為가 모두 조위에 호응했다. 유장이 재빨리 성도成都로 들어가 성을 지켰고 동주인東州人은 위韙가 두려워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유장을 도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결국 반란군을 격파하고 강주江州로 진격해 조위를 공격했다. 조위의 장수 방악龐樂과 이이李異가 군대를 돌려 조위의 군사를 공격해 조위를 참수했다.” 한헌제춘추漢獻帝春秋: “한漢 조정에서는 익주에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 우단牛亶을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고 유장을 불러 경卿으로 삼았으나 (유장은) 가지 않았다.] 유장이 조공曹公(조조)가 형주荊州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들리고 한중漢中을 평정하자 하내河內 음부陰溥를 보내 조공에게 경의를 표했다. (조공은) 유장을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삼고, 형 兄 모瑁는 평구장군平寇將軍으로 삼았다. 모瑁는 광질狂疾에 걸려 일을 돌볼 수 없었다.(物故) [신송지안臣松之案(배송지 의견): ”위대魏臺가 ‘물고物故의 뜻을 찾자 고당륭高堂隆이 답했다. ’스승에게 듣기로, 물物은 없다(無)는 것이고 고故는 일(事)을 말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유장이 다시 별가종사別駕從事 촉군蜀郡 장숙張肅에게 수병[叟兵: 사천성 서남부에 거주했던 집단(叟人)으로 구성된 병사로 매우 용맹했다고 함.] 300명과 잡어물雜御物을 조공에게 보냈다. 조공이 장숙을 광한태수廣漢太守에 임명했다. 유장이 다시 별가別駕 장송張松을 조공에게 보냈고 조공은 이때 이미 형주荊州를 평정하여 선주先主를 쫓아냈기에 장송에게는 따로 관직을 주지 않았고 장송은 이에 원한을 품었다. 조공의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불리해진데다 역병으로 죽어나갔다. 장송은 돌아와 조공을 비방하고 유장에게 관계를 끊을 것을 건의했다. [한서춘추漢書春秋: 장송張松이 조공曹公을 보고 조공이 정벌 성과에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장송을 보고하지 않았다. 장송이 돌아와 유장에게 관계를 단절할 것을 건의했다. 습착치習鑿齒가 말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그 공을 한 번 자랑하자 뒤돌아 선 게 아홉나라였다고 조조曹操가 잠시 교만한 마음을 갖고 정벌한 탓에 천하가 삼분된 것이니 모두 수십년 간 추진했던 일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된 꼴이니 어찌 애석하다 아니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군자는 밤낮으로 겸손함에 힘쓰고 아래 사람처럼 생각해야 한다. 공로가 커도 겸손하게 행동해야 하며 권세가 고귀해도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미물에게도 마음을 가까이하면 비록 고귀해도 사람들이 그 무게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며 군중들에게 덕을 베풀면 업적이 창대해도 천하가 기쁘게 경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하면 능히 부귀를 얻고 공로와 업적을 보전하며 당대에 융성하고 백세에 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교만하게 굴겠는가! 군자는 조조曹操가 결국 이것 때문에 천하를 겸병할 수 없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장송이) 말하길, “유예주는 사군의 폐부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유장이 그렇게 여겨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先主(유비)와 우호관계를 맺고 얼마 뒤 다시 법정과 맹달孟達을 시켜 병력 수천을 보내 선주의 방어를 도왔다. 그리고 법정이 돌아왔다. 이후 다시 장송이 유장에게 말했다. “지금 주중의 장수 방희龐羲, 이이李異 등은 모두 공을 믿고 교만해져 밖에 마음을 두고자 하니 예주豫州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이 밖에서 공격하고 백성이 안에서 공격하면 결국 패망하는 길입니다.” 유장도 이를 따라 법정을 보내 선주에게 청했다. 유장의 주부主簿 황권黃權이 그 손익을 설명하고 종사從事 광한廣漢 왕루王累는 익주 성문에 거꾸로 매달려 간언했으나 유장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선주가 가는 곳마다 받들어 모시게 하니 선주가 경계를 넘는 것이 마치 돌아오는 듯했다. 선주가 강주江州의 북쪽을 지나 점강수墊江水를 거쳐 다시 부涪에 당도했다. (부는) 성도에서 360리 거리다. 이해가 건안建安16년(211)이었다. 유장은 보병과 기병 3만여 인을 거느렸고 수레에 실은 장막은 휘황찬란했다. 도착해 바로 연회를 여니 선주가 거느린 장수들이 서로 다시 만나 백여 일간 먹고 놀았다. 유장이 선주에게 군자를 주고 장노를 토벌해 달라고 한 뒤 헤어졌다.[오서吳書: 유장은 유비에게 쌀 20만곡, 기병 천 필, 수레 천 승, 옷감과 솜[繒絮錦帛]을 군자로 보냈다.]
이듬해 선주가 하맹葭萌에 도착해 병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하자 가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19년 진격해 성도를 수십일 포위했으나 성 안에는 정병 3만명이 있고 양식과 옷감이 1년을 버틸 수 있었으며 관리와 백성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우고자 했다. 유장이 말했다. “부자가 주에 있은 지 20여 년인데 은덕을 베풀어 백성에게 해 준 것이 없다. 백성이 3년간 전쟁을 치르며 초야에 거름이 된 것은 모두 나(장) 때문이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끝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 그 아래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자가 없었다. 선주가 유장을 남군南郡 공안公安으로 옮기고 재물을 모두 돌려주고 예전 진위장군振威將軍의 인수印綬도 그대로 차게했다. 손권孫權이 관우關羽를 죽이고 형주荊州를 빼앗은 뒤 유장을 익주목益州牧에 삼고 자귀秭歸에 주둔케 했다. 유장이 죽자 남중南中의 호걸이 옹개雍闓를 이끌고 익군益郡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오吳로 돌아섰다. 손권이 다시 유장의 아들 천闡을 익주자사益州刺史에 임명해 교주交州와 익주益州 경계에 두었다.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남토南土를 평정하자 천闡이 오吳로 돌아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오서吳書: 천闡은 일명 위緯로 사람됨이 공순하고 예의가 바른데다 재물을 가벼히 여기고 의를 중시하여 겸양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 애초 유장의 장자 순循의 처는 방희龐羲의 딸인데, 선주가 촉을 정벌하고 방희를 좌장군사마左將軍司馬로 삼았는데, 순은 유장 때부터 방희를 따라다녔고 선주는 그를 봉거중랑장奉車中郎將으로 삼았다. 이로써 유장 두 아들의 후손은 오와 촉에 나눠살게 되었다.
평: 옛날 위표魏豹는 허부許負의 말을 듣고 박희薄姬를 궁실로 들였고[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 허부許負는 하내河內 온현溫縣의 부인으로 한漢이 고조高祖가 명자정후明雌亭侯로 봉했다. 신 배송지裴松之가 말합니다. 오늘날 동인東人은 모母를 부負라고 합니다. 공연이 허부를 부인으로 본 것은 비슷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고조 때 모든 열후를 분봉했지만 향정鄉亭의 작위는 없었으니 봉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유흠劉歆이 도참圖讖의 글을 읽고 이름을 바꾸었어도 끝내 자신을 지킬 수 없었으니 (오히려) 이주二主(유연, 유장 두 명의 주군)는 축하할 일이다. 이는 신명神明은 준비없이 요구할 수 없고 천명天命은 망령되게 바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유언劉焉은 동부董扶의 말을 듣고 익주 땅에 마음을 두었고 점쟁이의 말을 믿고 오씨吳氏에게 구혼하여 가마와 예복[輿服]을 만들고 신기神器를 훔치려 했으니 미혹함이 심했도다. 유장 劉璋의 재주는 영웅은 아니었으니 난세에 터전을 잡아 수레를 끌어야 할 사람이 수레에 타고 있다 결국 도적 당한 것으로 이는 자연의 이치이니 빼앗기긴 했어도 불행은 아니었다 하겠다.[장번張璠: 유장은 어리석고 유약하며 좋은 말을 지키려 했으니 이 역시 송양공宋襄公, 서언왕徐偃王의 무리로 무도한 군주는 아니다. 장송張松과 법정法正은 비록 군신君臣의 의리는 바르지 못했지만 진실로 이름을 버리고 실질을 쫓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 형세를 진술하였으니 한숭韓嵩과 유광劉光(유선劉先)이 유표劉表에게 했던 말대로 물러나 절교를 고하지 않고 달아났던 것이며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이 항우項羽에게서 도망쳤던 것처럼 양끝에서 다른 마음을 품었던 것이니 불충한 일을 획책했던 죄는 그 다음이라 하겠다.]
璋, 字季玉, 既襲焉位, 而張魯稍驕恣, 不承順璋, 璋殺魯母及弟, 遂爲讎敵. 璋累遣龐羲等攻魯, 〔數爲〕所破. 魯部曲多在巴西, 故以羲爲巴西太守, 領兵禦魯. 後羲與璋情好攜隙, 趙韙稱兵內向, 眾散見殺, 皆由璋明斷少而外言入故也. 璋聞曹公征荊州, 已定漢中, 遣河內陰溥致敬於曹公. 加璋振威將軍, 兄瑁平寇將軍. 瑁狂疾物故. 璋復遣別駕從事蜀郡張肅送叟兵三百人并雜御物於曹公, 曹公拜肅爲廣漢太守. 璋復遣別駕張松詣曹公, 曹公時已定荊州, 走先主, 不復存錄松, 松以此怨. 會曹公軍不利於赤壁, 兼以疫死. 松還, 疵毀曹公, 勸璋自絕, 因說璋曰: 「劉豫州, 使君之肺腑, 可與交通. 」璋皆然之, 遣法正連好先主, 尋又令正及孟達送兵數千助先主守禦, 正遂還. 後松復說璋曰: 「今州中諸將龐羲、李異等皆恃功驕豪, 欲有外意, 不得豫州, 則敵攻其外, 民攻其內, 必敗之道也. 」璋又從之, 遣法正請先主. 璋主簿黃權陳其利害, 從事廣漢王累自倒縣於州門以諫, 璋一無所納, 敕在所供奉先主, 先主入境如歸. 先主至江州北, 由墊江水墊音徒協反. 詣涪, 音浮. 去成都三百六十里, 是歲建安十六年也. 璋率步騎三萬餘人, 車乘帳幔, 精光曜日, 往就與會;先主所將將士, 更相之適, 歡飲百餘日. 璋資給先主, 使討張魯, 然後分別.
明年, 先主至葭萌, 還兵南向, 所在皆克. 十九年, 進圍成都數十日, 城中尚有精兵三萬人, 穀帛支一年, 吏民咸欲死戰. 璋言: 「父子在州二十餘年, 無恩德以加百姓. 百姓攻戰三年, 肌膏草野者, 以璋故也, 何心能安!」遂開城出降, 羣下莫不流涕. 先主遷璋于南郡公安, 盡歸其財物及故佩振威將軍印綬. 孫權殺關羽, 取荊州, 以璋爲益州牧, 駐秭歸. 璋卒, 南中豪率雍闓據益郡反, 附於吳. 權復以璋子闡爲益州刺史, 處交、益界首. 丞相諸葛亮平南土, 闡還吳, 爲御史中丞. 初, 璋長子循妻, 龐羲女也. 先主定蜀, 羲爲左將軍司馬, 璋時從羲啟留循, 先主以爲奉車中郎將. 是以璋二子之後, 分在吳蜀.
評曰: 昔魏豹聞許負之言則納薄姬於室, 劉歆見圖讖之文則名字改易, 終於不免其身, 而慶鍾二主. 此則神明不可虛要, 天命不可妄冀, 必然之驗也. 而劉焉聞董扶之辭則心存益土, 聽相者之言則求婚吳氏, 遽造輿服, 圖竊神器, 其惑甚矣. 璋才非人雄, 而據土亂世, 負乘致寇, 自然之理, 其見奪取, 非不幸也.
三國志 卷31 蜀書1 劉二牧傳(劉璋), pp.868~879, (注의 원문은 생략, 번역만 / 하늘색 글자가 注)
'오늘의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서) 남연의 두 번째 황제, 모용초 (전편) (0) | 2023.08.26 |
---|---|
(삼국지) 신이 된 장수, 관우關羽 (0) | 2023.08.12 |
(삼국지) 조자룡, 전설이 되다.(후편) (0) | 2023.08.02 |
(삼국지) 조자룡, 전설이 되다.(전편) (0) | 2023.08.02 |
(삼국지) 촉한의 후장군, 황충黃忠 (0) | 2023.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