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이태진 교수의 오류, 성암 김재계를 송암 김재식으로 본문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2024년 6월 27일 세종특별자치시 시청 여민관에서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학술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두 채의 한옥(송암 김재식 고택, 홍판서댁 - 홍순형 고택, 전 유계화 가옥)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조성하고자,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기에 발표한 사람은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 등이었다. 이날 이태진은 "의친왕 이강과 송암 김재식의 유대 관계 추적 - 황제 직속 항일 정보기구 '제국익문사' 활동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글에 의친왕과 송암 김재식의 관계는 매우 적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날 함께 발표한 이영주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은 기초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송암 김재식이 세종, 청주에 세거했다는 것도 몰랐고, 그의 문집, 송암집은 한 줄도 읽어보지 않은 듯했다.(아래 링크 참조)
1. 김재식이 천도교청년동맹에?
전직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라는 타이틀 탓에 이태진의 발표는 이날 여러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타이틀이 무색하게 그의 주장 여러 곳에서 어이 없는 착오가 보인다. 그 중 하나를 여기서 지적한다. 이태진의 글을 살펴보면,
1919년 10~11월 「대동단 사건」 이후 송암 김재식과 의친왕이 식민 당국의 의심을 받거나 사찰을 받은 사건이 각 1건씩 확인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결과로 (1) 1927년 8월 15일 자 경성 종로경찰서가 검찰에 보낸 천도교 청년동맹 제5회 집행위원회 결의 사항 중 청년동맹 훈련원 설립과 관련해 선출한 ‘지도자 5인’ 가운데 김재식의 이름이 오른 것, 1928년(쇼와 3)부터 1932년 (쇼와 7) 1월까지 3년 이상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창덕궁 경찰서 1건)가 ‘의친왕공비(義親王公妃) 양전하(兩殿下)를 경비’한 사실, 두 가지가 나왔다. 전자는 사상범에 대한 동정 감시 보고서이며, 후자는 의친왕이 식민 통치 당국이 요구한 일본행을 거부한 후 ‘공·비(公·妃) 두 전하’의 외출 동정이 감시 받은 사항으로 무려 104건의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발표를 준비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를 뒤졌다. 동 DB는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김재식을 검색해 보면, 한글은 물론 한자로 金在植을 검색해도 여러 사람이 나온다. 즉, 김재식은 흔한 이름이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북청의 김재식도, 남명 계열 문인이었던 김재식도 나온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자료만 콕 찝어 "송암 김재식이 식민 당국의 의심을 받고나 사찰을 받은 사건"의 근거로 사용했을까? 다른 자료는 동명이인이라고 판단해서 거른 것일까? 그럼 실제 DB를 확인해보자. 해당 문서는 "천도교청년동맹 제5회 집행위원회 개최에 관한 건"으로 경성종로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검사정에게 1927년 8월 15일 보낸 것이다. 김재식의 이름이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2. 이태진이 제기한 근거
(2) 同盟員訓練ノ件
同盟員訓練ニ關シ訓練機關ヲ置クコトヽシ本機關ハ無名ニシテ指導者トシテ委員五名ヲ選擧スルコトニ可決シ / 申泰舜 金庚威 劉漢日 金在植 朴來弘ヲ選擧セリ
이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2) 동맹원 훈련 건
동맹원 훈련에 관하여 훈련 기관을 설치하기로 하였고, 이 기관은 명칭을 두지 않고 지도자로서 위원 5명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 신태순, 김경위, 유한일, 김재식, 박래홍을 선출했다.
3. 이태진, 김재계를 김재식으로 잘못 읽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김재식의 문집인 송암집에는 어디서도 천도교에 입교했거나 교인이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강면에서 만석지기로 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경성에 나타나 천도교 중앙의 간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많은 DB가 그렇듯, 텍스트 입력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학자라면 반드시 그 원본을 확인해야 한다. 그럼 원본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김재식 같지만, 해당 글자는 植이 아닌 桂일 수도 있다. 해당 글자를 좀더 자세히 보자.
글자만으로는 파악하기 애매하다. 천도교를 키워드로 자료를 찾아보면, 동아일보 1926년 4월 2일자에는 천도교회 청년동맹 창립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는 천도교회 청년동맹 창립과 더불어 규행위원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이 나온다. 이기열, 이기정, 신태순, 강세희, 박한규, 김재계, 최병현, 김덕연, 공순용, 손재기, 조정호, 오일철, 박래홍.
김재계를 포함하여 신태순, 박래홍은 앞서 인용한 종로경찰서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위 DB의 인명은 김재식이 아니라 김재계로 읽어야 한다.
4. 근거 오류를 딛고 상상의 나래로
이런 실수는 곧잘 할 수 있다. 필기체 또는 초서는 비슷한 글자가 많고 쓰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문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태진도 그냥 추정으로 두었다면 별 문제 없었을 것이다. 진정 역사학자라면 여기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이태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원본도 확인 안하고 어찌 일말의 회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을까. 종교적 신념에 몰입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여하튼 다시 이태진의 글을 인용한다.
송암 김재식은 위 감시 대상에 오른 이듬해 1928년에 사망하며, 의친왕은 사실상 사회 활동이 정지당한 상태에서 1928년 고인이 된 김재식을 위해 「신도비」(3월)와 「신정기」(8월)를 각각 지어 10여 년에 걸친 동지애 표지를 남겼다. 그런데 1920년대 두 사람의 동지애에 동학 농민군 지도자 출신의 천도교 인사들의 활약이 고리 역할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태진이 DB의 여러 검색 결과 가운데 왜 이 자료를 꼽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본인이 잘못 파악한 것도 모른 채, 의친왕과 김재식을 동학 농민군 지도자 출신의 천도교 인사들과 엮어 설명하고자 이 자료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저 문장 뒤로 장장 2페이지 여에 걸쳐 천도교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다. 송암 김재식 생전에 의친왕과의 연결고리는 전무하다. 그래서 천도교로 엮어 이를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거가 자체가 틀렸으니 의미 없는 건 물론이오, 불필요했다. 지면 낭비다. 이후 그의 논리 전개는 "합리적 추론"이 아닌 상상의 소산이다. 의친왕과 김재식을 이어줄 수 있는 실물 증거는 의친왕이 김재식 사후에 써준 신도비명과 송암신정기에 불과하다. 이 자료는 후손이 받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독립운동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김재식의 삶은 독립운동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훌륭할 수 있다.(송암집 참조) 더 이상 김재식의 삶을 허위로 분식하면서 망자를 욕되게 하지 말고 진짜 독립운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길 바란다.
진짜 독립운동가 김재계 선생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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