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 이강, 친일파와 의병 활동을? 본문
의친왕 이강은 상해 임시정부의 망명 시도로 대한제국의 여타 다른 황족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시도를 제외하고 그의 독립운동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음주벽이나 축첩으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윤치호 역시 일기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친왕을 모셔가도 별반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여러 매스미디어 등에서 고종, 명성황후, 덕혜옹주 등을 독립의 아이콘으로 그려 내면서 마치 이것이 사실인냥 포장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2024년 6월 27일 시청 여민관에서 개최한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학술행사도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집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www.sejong.go.kr/bbs/R0071/view.do?nttId=B000000112593Pg1mN3c
세종시는 야심 차게 행사를 개최했고, 마친 뒤에도 꽤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증언과 학술발표가 뒤섞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첫 발표였던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의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이다. 그는 의친왕의 화려한 이력을 사실처럼 이야기했지만 그 중에는 고증할 수 없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중 하나로 의친왕이 의병을 육성했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다.
"1909년(융희 3년) 10월, 의친왕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정온고택>의 정태균을 방문하여 40일간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있는 사람들과 북상의 사선대 일대에서 의병을 양성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호송되었으나, 일부러 정온고택의 처가댁인 경주 최부잣집을 들러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1. 의친왕의 필적 = 독립운동?
의친왕의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친왕의 글씨가 있는 곳은 모두 독립운동 현장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종종 모순에 빠지곤 하는데, 위 문장도 마찬가지다. “강제 호송되는 와중에 경주를 들러 독립자금을 마련”하다니, 일제의 감시 탓에 문서 쪼가리, 임정의 공채 한 장 남기지 못했다면서 도대체 누가 강제호송했길래 저리 옆길로 새서 독립자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는지. 그렇다면 의친왕이 거창에서 의병을 양성했다던 1909년 10월의 행적을 살펴보겠다.
1909년 이미 조선은 양력으로 개력했지만 음력도 병행했다. 따라서 위 증언의 “10월”은 양력일 수도 있고 음력일 수도 있다. 음력이라면 양력 11월 13일(10월 1일)부터 12월 12일(10월 30일)까지다. 10월이 정온 고택을 떠난 날일 수도 있으니, 9월 중순부터 의친왕의 행적을 추적해 보겠다.
(1909.09.11./황성신문) 의친왕전하참알義親王殿下參謁: 의친왕 전하께옵서 재작일 하오 2시에 대황제 폐하께 폐견하였다더라.
(1909.09.24./대한매일신보) 의왕소창義王消暢: 의친왕 전하께서 재작일에 동소문東小門 외 음벽정飮碧亭에 전왕하여 소창귀환消暢還歸하셨다더라.
(1909.10.05./황성신문) 친왕소창親王消暢: 의친왕 전하께서는 재작일 일요일 상오 8시에 동소문 외 신흥사新興寺에 출왕소창 하신 후 동 하오 4시에 환입하였다더라.
(1909.10.15./황성신문) 친왕관풍親王觀楓: 의친왕 전하께옵서 작일 상오 11시경에 동소문외東小門外 음벽정飮碧亭에 행계行啓하여 관풍소창觀楓消暢하시고 바로 환저還邸하셨다더라.
(1909.10.28./대한매일신보) 의친왕 도일설: 이번 이토 공 피해한 일에 대하여 대황제 폐하께옵서서 일본으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신다는 데 의친왕 전하께서 가실 듯하다는 말이 있다더라.
(1909.10.29./대한매일신보) 의친왕 방문: 의친왕 전하께서는 작일 오전 10시에 통감을 방문하고 이토 공(이토 히로부미)의 피해 일을 위문하셨다더라.
(1909.10.30./황성신문) 칙사勅使와 수원隨員: 의친왕 전하께옵서 대황제 폐하의 칙사로 작일 상오 8시 경부철도 제1번 열차로 발정 도일하셨는데, 수(행)원은 승녕부承寧府 부총관副総管 박제빈朴齊斌, 의친왕궁찬위義親王宮贊尉 이인용李仁用, 예식관禮式官 박서양朴敍陽, 궁내부차관宮內府次官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 궁내부사무촉탁宮內府事務囑托 사에키 다쓰(佐伯達) 제씨 등으로 찬정하였더라. - 출발 직전 변경됨
(1909.11.09./대한매일신보) 황손탄생: 거월 29일에 의친왕께옵서 근행近幸하시던 본궁本宮 나인內人 정씨는 황손을 탄생하였다더라.
(1909.11.23./황성신문) 친왕임문親王臨問: 의친왕 전하께옵서 삼작일 하오 4시에 포병하에 있는 안상호安商浩 진찰소診察所에 친림親臨하셨다가 즉시 귀저하였다더라.
(1909.11.28./대한매일신보) 의왕문안義王問安: 의친왕 전하께옵서 재작일 하오3시에 덕수궁에 진예하여 태황제 폐하께 문안하셨다더라.
(1909.12.08./대한매일신보) 의왕폐견義王陛見: 의친왕 전하께옵서 대황제폐하께 폐견하고 금번 소위 일진회一進會 성명서聲明書에 관한 일을 상주하다가 눈물을 삼키셨다는 설이 있더라.
(1909.12.23./대한매일신보) 왕군폐현: 작일 오전 12시에 의친왕 전하와 완흥군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양씨가 덕수궁에 들어가 폐현하였다더라.
2. 1909년 10월, 의친왕은 거창에 없었다.
대한제국 시대 신문 기록에서 의친왕의 거둥을 대략 10일 간격으로 살펴보면, 서울 밖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 기록을 볼 때, 1909년 10월, 그 달이 양력이건 음력이건 의친왕이 서울을 떠나 경남 거창에서 40일간 머물렀다는 말은 허구다. 요즘처럼 KTX가 있어 며칠 만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의친왕이 정온 고택에서 40일 머무르지 않았다면, 사선대에서의 의병 양성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출처 없는 증언이 이렇다. 이준 씨는 이 허황된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들었을까? 본인 선대의 행적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 어찌 이를 "증언"이랍시고 운운한단 말인가. 사실도 제대로 파악 못하며 역사 바로세우기를 한다는 건 언어도단에 불과하다.
3. 의병 활동을 꾸며내고자 친일파를 독립지사로 둔갑시키기까지
의친왕은 훌륭한 서예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글씨가 있다고 독립운동의 이야기가 서려 있있는 건 아니다. 의친왕이 김재식 신도비만 써주었을까? 사돈 박영효의 신도비도 의친왕이 지었다. 의친왕의 서예 작품을 받은 사람은 독립지사도 있고, 친일파도 있다. 일본인도 있다. 그렇다면 의친왕과 함께 했다는 정태균은 어떤 사람일까. 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나오는 정태균의 인물정보(근현대인물정보)다.
정태균鄭泰均
출신지: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창군居昌郡 위천면渭川面 강천리薑川里(원적)
현주소: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창군居昌郡 위천면渭川面 강천리薑川里
경력 및 활동
1908년 10월 함양군 안의에서 사립 의명학교義明學校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됨
1909년 폭도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위천면에 수비대가 파견되자 이들에게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
1913년 4월 위천면에서 사립 고북학교古北學校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됨
1916년 위천면에 사재를 들여서 잠업전습소蠶業傳習所를 설립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의 대표로서 총독부 주최 시국강연회에 출석하여 청강
1925년 진주의 사립 일신여자고등학교一新女子高等學校에 일금 3천원 기부
부락민들을 위해 사재를 들여 우물을 파고 약과 식량을 매년 나눠줬음.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본도本道(경상남도)의 관선 도회의원道會議員 등도 역임
위 전거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 표창자 명감”이다. 주소로 볼 때 이준이 언급한 정태균과 동일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마을 유지로서 교육 등 방면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친일 부역자 혐의는 벗기 어려울 듯하다.(이후 행적도 포함해서, 아래 신문 참조) 심지어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이 증언한 1909년, 정태균은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수비대에게 주택을 개방해 임시 막사로 내주었다. 1909년 “각지에서 봉기한 폭도”가 바로 의병이다. 그리고 “수비대”란 군대 해산 이후로 일본 군경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의병 토벌에 협력했다는 이야기다. 의친왕이 그곳에 정태균과 함께였다면 의병 토벌의 선봉에 섰다는 말 밖에 안된다. 이는 의친왕의 독립운동을 가공하려다가, 또 의친왕 필적 = 독립운동을 공식으로 삼다 보니 정태균마저 독립운동가로 만든 셈이다.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야말로 식민사학을 능가하는 역사 왜곡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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