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토사구팽 대마왕 고종, 헤이그 밀사를 배신하다 본문
고종은 어떤 군주인가? 매스미디어에서는 얼치기 작가, PD들이 고종을 미화하고, 또 모 전직 대학 교수는 종교를 믿듯 고종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력과 자기 복제로 각주 달며 찬양고무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많은 사람은 고종을 근대군주, 혹은 시대의 한계로 주저앉은 애석한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의 치세를 돌아보면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강력한 군권으로 제 멋대로 하다가 망국의 길을 연 군주이며, 근대의 물산을 좋아하면서도 전근대의 군주권을 휘두르고자 했던 자다.
고종의 진면목은 그가 신하를 대할 때 드러났으니, 이 방면에서만큼은 사악하리만큼 악독했다. 자신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하를 헌 신짝 버리듯 했다. 그 일례가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이다. 고종은 이상한 냄새에 마시진 않았으나 별생각 없이 들이켰던 황태자(훗날 순종)는 이빨이 다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정신 상태도 희미해졌다는.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처형된 자는 김홍륙이다. 김홍륙은 뼛속까지 친러파로 고종과 러시아인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고 또 아관파천에 조력해 공을 세웠다. 즉 고종에게 러시아와 연락하는 끈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일개 천한 신분에서 러시아어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자 적도 늘었다. 특히 황족 이재선은 친러파 내에서 경쟁상대였다. 러시아와 이어줄 수 있는 끈이 늘어나자(또한 러시아도 고종에게 다가가고) 황제 역시도 계속 그의 뒷배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사익을 착복했다는 혐의로 유배 갔다. 독살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공식 기록에는 고종의 변심에 치를 떨어 그런 일을 꾸몄다고 하나, 혹자는 김홍륙을 영원히 골로 보내고자, 그리고 설령 황제가 골로 가도 나쁠 것 없었던 황족 이재선이 꾸민 일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부릴 때는 총애를 한 가득 안겨주다 또 필요 없어지면 매몰차게 쫓아냈던, 토사구팽 전문가 고종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사건을 두고 의친왕의 후손이라는 모씨는 "일제에 의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며, 불리한 모든 건 일제 탓으로 돌리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제에 의해 36년간 가장 호의호식한 집안이 바로 이왕가, 전 황실이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덴 하흐)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한국 사절의 도착을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밀사들의 회의장 출입은 불허 되었지만, 각국 언론의 주목을 끄는 사건이었다. 밀사를 그곳으로 보낸 장본인이 고종이란 것은 일본도 훤히 알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 소식이 알려지자 고종은 쾌재를 불렀을까? 아니다. 고종은 1907년 6월 11일(양력 7월 20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밀사를 사칭하고 외교를 망쳐 놓은 자들을 엄히 처벌하라" 아래는 왕의 거둥을 기록한 승정원일기(표제: 비서감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사진은 아래에)
조서를 내리기를,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의 무리는 어떤 흉악한 심보를 타고났으며 어떤 음모를 품었단 말인가. 몰래 해외로 침투하여 밀사密使를 사칭하고 각국을 현혹하여 하마터면 나라 외교를 망쳐 놓을 뻔하였으니, 그들이 한 짓을 따져 보면 중죄를 받아 마땅하다. 법부로 하여금 율문대로 엄히 처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일본의 보복이 두려웠던 고종은 이렇게 꼬리자르기를 시도했다. 이런 인간은 회사에서 만나도 지옥인데, 임금으로 만났던 백성들은 어땠을까. 참고로 고종이 조서를 내렸던 날, 날은 참 맑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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