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역사왜곡: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은 허구다 본문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 #완은군 #이주용 #역사왜곡 #세종특별자치시 #의친왕
1. "제국익문사비보장정"과 제국익문사
몇 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제국익문사비보장정"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다. 고종 재위 시기 통신사(정보원)에 대한 규정으로 직제와 역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은 고종의 지휘 하에 실제 활동했던 듯 제국익문사를 그렸다.(또 무슨 소설도 하나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자를 제외하곤 제국익문사에 관한 어떤 자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누가 참여했으며, 또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던 어느날 의친왕기념사업회에서는 이호석李浩奭의 유품으로 전한다며 도장 2과(성총보좌인, 제국익문사독리인)를 공개했다. 그러자 그간 고종 미화에 공들였던 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은 이들의 구전(口傳)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제국익문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다.
최근 세종시에서 개최한 학술포럼에서는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과 사무총장 이영주, 그리고 이태진 교수가 총출동해 지금까지 그들이 밝힌, 또는 집안에 전하는 “증언”을 펼쳤다. 그 가운데 이영주는 제국익문사가 사용했던 암호(?)까지 거론하며 제국익문사 조직과 활동을 열거했다. 최근 해당 학술포럼의 자료집을 접하고 그들의 주장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하는 그 중 일부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이영주는 동 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재선의 장남 이주용(李주鎔)(아명 호석(李浩奭))은 1894년 의친왕의 일본 보빙대사 사절단에 함께 수행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여 의친왕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의친왕은 일본 보빙대사 수행 중 이호석(이주용)에게 입고 있던 비단 관복의 소매 부분을 찢어 금석(金石)이라는 호를 내린다. 흥선대원군 운현궁 후손들은 전부 호에 ‘石’을 공유한다. (석파 이하응, 우석 이재면, 석정 이준용 등) 이주용은 서얼 출신으로 사촌동생 이준용과도 묘한 대립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의친왕의 잠재적 라이벌이자 고종황제에게도 껄끄러운 이준용을 견제하기에도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의친왕은 이호석을 가까이 두고, 미국으로 유학가기 직전 정3품 벼슬을 내리고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그 중 의친왕의 명을 받고 수차례 미국, 일본, 한국을 드나드는 정보원 역할을 하였다.
2.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과 이주용
역사를 공부했다면 이 글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대충 몇 개 추려보자면, 첫 번째, 제시한 사진이 관복 소매 부분인지 알 수 없으나 거기엔 ‘金石(금석)’이 아니라 ‘錦石’이다. 두 번째, 호號는 남이 지어주기도 하지만 대개 스스로 짓는다. 그는 “흥선대원군 운현궁 후손들은 전부 호에 ‘石(석)’이 들어간다”고 했지만 정작 이주용의 아버지 이재선의 호는 ‘산남(山南)’이다. ‘돌(石)’은 하찮지만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흥선대원군 후손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많이 쓴다. 실은 엮어보고자 별반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세 번째, 이재선은 역모 혐의로 1881년 사사되었다. 그리고 그가 복권된 것은 1907년이다. 만일 이주용이 살아 남았다면 역적의 자식일 뿐, 실직을 가진 이준용과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영주는 이주용이라는 이름 대신 이호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호석’은 이주용의 아명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주용과 이호석은 동일인이다. 정말 그럴까?
3. 이주용은 누구인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이주용’의 사적은 미상이다. 생몰년도 알 수 없다. 이영주는 이주용이 선대 어른이라면 그 생몰년을 제시해아 함에도 그의 글 어디에도 생몰년을 찾아볼 수 없다. 의친왕기념사업회조차 그의 생몰년을 제시한 바 없다.(심지어 의친왕보다 나이가 위인지, 아래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호석’의 사적은 간간이 눈에 띈다. 그가 기술했듯 이호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앞두고 보빙사의 일행으로 정사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 공)을 따라 일본에 간다. 다음은 대사 의화군을 따라 간 보빙사 명단이다.
大使 領宗正府事 義和君 李堈
正三品 學務衙門 參議 高永喜
正六品 前機器局 委員 李準榮
正六品 宮內府 主事 金峻基
從三品 前訓鍊僉正 張淳奎
正六品 前主事 金洛駿
從九品 司勇 金演泰
從者 李熙容, 申聲求, 韓景履, 李浩奭(이호석)
遊覽紳士
議政府都憲 從二品 俞吉濬
前縣監 正六品 金思濬
外務主事 正六品 金歡濟
議政府主事 從九品 趙重應
同 尹致旿
前主事 從九品 韓善會
壯衛營領官 正三品 李乘武
度支衙門主事 從九品 魚允迪
從者 金昌浩
出迎一行
辨理公使 金思純
譯官 韓永源
從者 日本人 1인
여기서 이호석은 종자다. 종자란 그냥 수행하며 짐꾼도 되고, 잡일도 하는 심부름꾼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종자는 대개는 집에서 부리던 하인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호석 역시 의화궁의 여러 하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4. 이호석은 이주용이 아니다.
따라서 애당초 이호석은 흥선대원군 서장자 이재선의 아들일 수 없다. 이영주가 함께 제시한 자료 역시 그 증거다.
(증거1) 먼저 관복을 찢어 써주었다는 “錦石(금석)” 액자를 보자. 말미에 의화궁은 “甲午菊秋書於日東精養軒中贈李浩奭”이라는 관지를 달았다. 즉 “갑오년(1894) 음력 9월 일본 도쿄 세이요켄(호텔이자 음식점)에서 이호석에게 주다”라고 썼다. 이영주에 따르면 이호석은 의화궁의 인척이다. 동성 인척에게 주는 글 가운데 성을 쓴 예가 있던가? 아마 그 경우, “족형 호석” 또는 “족제 호석”이라고 써주었을 것이다.
(증거2) 이영주는 이호석이 받은 칙명勅命을 제시했다. 칙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勅命
李浩奭爲
通政大夫
者
光武三年三月十九日
千秋慶節
座堂受
賀後義和君宮掌務賞加事奉
勅
칙명
이호석을 통정대부로 삼는다.
광무3년(1899) 3월 19일
천추경절 (황태자가) 좌당에서 축하를 받은 후
의화군궁 장무를 상으로 가자하는 일을 칙으로 받든다.
이 칙명에 대해 이영주는 이렇게 설명(해석)했다. “칙명 (임명장) 이호석을 정3품 통정대부로 삼는다. (광무3년(1899) 3월 19일 황태자의 탄신일에 궁중에서 축하 인사를 받고 의화궁의 실무직으로 직책을 주는 것을 받들 것을 명한다)” 그의 해석은 틀렸다. ‘통정대부’는 산관(散官)이다. 산관은 실제 업무와 자리가 없는 위계의 표식이다. 이건 상식이다. 그럼에도 “의화궁의 실무직으로 직책을 준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석을 구사한다. 이 교지는 황태자 생일을 맞아 이 기쁜 날 기쁨을 나누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로 ‘통정대부’라는 산관을 내려준다는 거다. 그리고 '궁 장무'란 좋게 말하면 '집사', 즉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행랑아범'인 거다. 그 당시 실직이 수반되지 않은 통정대부는 그 품은 높아도 허명에 불과하다. 이 역시 이호석의 지위가 높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주용일 수는 없다. 게다가 누가 칙명을 아명으로 받는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증거3) 이주용의 아버지 이재선은 1907년에나 사면 복권되어 옛 관작을 회복하고 완은군完恩君이란 호칭을 받는다. 그런데 이 완은군의 대를 이은 건 이주용이 아니라 양자 이관용李觀鎔이다.
완은군 미망인의 양자이연 소송, 팔십 노모 부양 않고 가산을 탕진한 자.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2통 3호 김백석 집에 있는 신소사는 경성 수표정 87번지 사는 자기 양자 이관용을 피고로 경성지방법원 민사2부에 양지리연養子離緣(절연)의 소송을 제기하여 지금 다나카 재판장의 계로 심리 중이라는데 사실의 내용인 즉 앞의 신소사는 고 완은군 이재선씨의 처로 메이지14년(1881) 중에 남편이 사망함으로 인하여 그 후 30년간 홀로 지내오다가 메이지45년(1912) 5월 중에 신소사는 이관용을 솔양하여 갖고 이래 양자로 같이 동거해 왔는데 이관용은 입양한 즉시로 주색에 침혹하여 부랑방탕함이 태심(극심)하여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가 허다한 중 양가의 전래하던 재산 전부를 탕진무여케 하고 선조의 분묘 산판을 파는 등 허다한 일이 많으며 또 낸 빚이 많을 뿐 아니라 신소사에 대하여 부량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므로 누누이 훈계를 하나 듣지 않고 본년 음력 9월 중에 시흥군에 있는 집을 팔아가지고 단독히 경성에 이주하여 80여 세의 양모를 돌아보지 않고 시흥군에 내버린 까닭에 신소사는 친족되는 집에 몸을 의탄하여 이쓴 중 그 자식은 양자로 삼을 수 없으니 절연케 해달라고 한 사실이라더라. [매일신보 1916.1.16.]
이재선의 처 신씨는 완은군 사후 30년을 혼자 살았다. 즉 당시 후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훗날 이재선이 완은군으로 사면 복권되고 5년이 지나서야 일족 중 하나인 이관용을 양자로 들였다.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잇고 서자가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 데, 양자를 들여 완은군의 대를 이었다는 건 이주용이 이때 이미 현실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래 장서각 소장 이왕가 친척표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이주용이 살아있었더라면 개망나니가 아니고서야 어찌 완은군의 제사를 받들지 않고, 아무리 양모라고 해도 모친을 저 지경에 방치해 두었겠는가.
이호석과 이주용은 각기 다른 사람이다. 만일 이호석이 이주용으로 행세했다면 이것은 종놈이 신분 세탁하고자 행방불명된 주인댁 가족을 사칭한 것이다. 제국익문사 독리라는 사람의 정체도 고증해보면 이 모양일진데, 여기에 무슨 이야기를 덧븥인단 말인가.
한 마디 더 하면 이호석은 의친왕이 미국갈 때 함께 가지 않았다.(이것도 몰랐나?)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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