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 이강의 일본 압송은 가짜뉴스 본문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이 '공'위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의친왕의 의병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지원 등을 보면서도 체포하지 못했던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로 압송되어 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이준은 이강이 공의 작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그 뒤 일본 규슈 지역으로 강제 압송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강은 병환을 이유로 은거를 청원했다. 물론 이강이 그리 쉽게 ‘공’의 자리를 자발적으로 버릴 인물은 아닌 만큼 이강의 퇴위는 어느 정도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준의 증언은 무리가 있다.
1930년 6월 12일 이전 이미 이강은 일본에 있었다.
1930년 6월 12일은 이강이 은거를 허락받은 날이다. 즉 왕공족심의회 의결에 따라 천황이 칙허했고 이는 아래와 같이 궁내성 고시로 발표되었다. 이강의 은거는 이틀 뒤인 6월 14일 조선에 알려졌다.
궁내성 고시 제26호
대훈위 이강공 전하 금일 칙허를 경하여 은거하심
소화5년(1930) 6월 12일 궁내대신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德郞)
궁내성 고시 제27호
대훈위 이강공전하 금일 은거하시옴으로 장자 이건공께서 가계를 계승하심
이강공의 은거에 대해 이왕직 서무과장 스에마스 구마히코(末松熊彦)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녕하신 관계로 오랫동안 바라시던 바인데 금번에 칙허로 결정되신가 봅니다. 이후 동경에 오래 계실는지 경성으로 돌아오실는 지 아직 모르겠으나 병환을 고치시기에 적당한 곳을 고르시게 될 것이니까 어느 곳이든지 병환에 좋은 장소면 그것에 많이 계시겠죠. 이강공 전하께서 은거하시는 것은 황송한 말씀이나 민간의 그것과 같이 대내대외의 가장으로서 일체의 책임과 의무를 버리는 것입니다. 즉 공연(公然)한 권리를 버리시는 것임으로 계후 없으신 유유자적의 생애를 보내실 것입니다. 전하가 은거하심을 따라 비 전하께서도 자연히 행동을 함께 하실 것임에 금후는 이건공 전하께서 공가의 어른이 되실 것입니다.(매일신보 1930.6.14.)
이준의 주장대로라면 이 고시가 떨어지자마자 이강은 일제에 의해 일본 규슈로 끌려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강은 이미 그 이전부터 일본에 체재 중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천황으로부터 은거를 허가받기 보름쯤 전, 이강은 요코하마의 포드 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끌려갔다던 사람치고는 이례적인 행보다. 그는 심지어 그 비싼 도쿄제국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도쿄제국호텔에 체재 중인 이강공 전하는 5월 27일 오후 2시 도쿠야 사무관을 대동하고 요코하마 고야쓰(子安)의 포드 공장을 미행으로 유람했다. 포드 사에서는 코프 지배인 이하 간부 사원 일동이 마중 나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전하는 일동의 안내로 공장 내외를 둘러보았다. 자동차와 관련해 전하께서는 여러 질문을 하셔서 일동은 그 박식함에 경탄했다. (경성일보 1930.6.3.)
이강은 도쿄 여행을 마치고 1930년 8월 16일 경성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1930년 6월 12일 일본 규슈로 강제 압송당했다는 이준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 도쿄에서 바로 규슈로 끌려갔을까? 이 역시 아니다. 이강은 8월 18일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경성에 잠시 머문 뒤 이강은 다시 조선을 떠나 일본 규슈로 향했다. 그리고 한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 시간은 틀렸지만 이준이 말한 압송은 이것을 말한 것일까?
끌려갔다는 장소는 온천으로 유명한 벳푸(別府)
이강이 압송당했다는, 그리고 실제 장기간 체재한 장소는 규슈 가운데서도 벳푸(別府)다. 요즘도 그렇지만 벳푸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하다. 압송 장소치곤 이상하다. 왜 벳푸일까.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귀양을 보내면 삼수갑산, 또는 남쪽 도서 지역을 보냈건만, 일제는 관광지 벳푸로 귀양을 보냈다는 건가? 이강은 은거 사유로 오른쪽 다리의 지병을 들었다. 그는 병의 치료를 위해 온천을 즐겨 찾았다. 이에 앞서 1929년 10월 벳푸(別府)를 방문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벳푸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은 지병의 치료 때문일 것이다. 이준은 이어 이강이 규슈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내내 귀국을 모색했다고 한다.
틈틈이 한국 귀국의 틈을 보던 의친왕은 1934년 첫째 딸 이영의 결혼식 참석을 핑계로 잠시 한국에 다녀간다는 이유로 귀국, 굴하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현궁, 석파정, 성북동 별장, 충북 부강면, 전북 정읍, 전남 광양, 경남 거창, 경북 경주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간다.
이영의 결혼 한 해 전에도 경성에 오다
이준의 말에 따르면 1934년까지 이강은 규슈에 억류도 되어 “귀국의 틈”을 보았다고 한다.
이강 전하 귀경: 보양하고자 벳푸에 체재 중이시던 이강 전하께옵서는 강 어용계를 대동하고 1일 오후 4시 44분 열차로 영등포역에 도착, 동역에서 자동차로 입성하옵신 바 전하께옵서는 당분 경성에 체재할 예정이시다. (조선중앙일보 1933.5.3.)
그러나 정작 이강은 한 해 전인 1933년 경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사진도 있다.(위를 참조) 이강은 몇 달간 머무르며 중간에 비(의친왕비 김씨)가 정양 중이던 황해도 배천(白川)에도 다녀왔다. 이준이 미처 이 사실을 몰랐다거나 또는 왕실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달랐다면 이는 아마도 의친왕이 이때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선호텔에 투숙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애당초 의친왕은 사동궁에 잘 들어가지 않았던 듯하다.) 이강은 한 해를 보낸 뒤 1934년 5월 5일 밤 경성을 출발해 일본 도쿄로 갔다. 그리고 17일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딸의 결혼 때문에 귀국한 것은 애초 여행 일정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럼 이강은 그 뒤로 다시는 일본에 가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강은 1935년, 1936년, 1940년에도 일본을 방문했다.
이강은 오른쪽 다리의 치료를 위해 벳푸에서 체재했다. 억류가 아니다.
이준에게 묻고 싶다. 1934년 굴하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년 1930년에는 굴복해서 간 것인가? 그리고 만일 압송하고자 했다면 이강이 굴하지 않는다고 일제가 가만히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의친왕을 상해로 데려가려다 실패했던 전협田協은 산송장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풀려난 뒤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일제의 통치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의친왕의 미화를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려니 이렇게 역사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다.
일제의 폭압을 비판할 때는 반드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엄정한 검증 없이 추측이나 추정으로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오히려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비판마저도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세종특별자치시)가 발행하고 온라인에 공개한 자료집에 사실이 아닌 내용이 있어 이렇게 자료를 조사하고 확인해 글을 올린다. 학문적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하며, 틀린 부분이 있다면 공개 사과하고 바로잡을 것이다. 최근 다니엘 튜더가 의친왕 관련 소설을 출간했다고 하여 눈길을 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문 지상에 소개된 기사로 볼 때, 그가 얼마나 자료를 충실히 조사했을까 다소 회의적이다. 구술사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기억 또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2차(또는 그 이상의) 구전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쩄든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이 될 수는 없다. 역사 기술에서 올바른 관점보다 중요한 건 정확한 사실이다. 자료를 잘 정리해 언젠가는 "인간 이강李堈"이란 제목으로 책을 발간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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