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다니엘 튜더는 김란사를 아시나요?(하란사 독살설 비판) 본문
여성 선각자 하란사 또는 김란사
깊어 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훌륭하게 차린 귀부인이 하녀들의 등불을 따라 스크랜튼 부인의 방을 두드렸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불을 껐다.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나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귀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입학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경향신문 1962.7.2., 대학가의 리창(裏窓), 이화여대(2)]
위의 귀부인이 바로 남편의 성을 써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던 여성, 김란사다. 그녀는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첫 미국 학위소지자다. 그녀는 귀국해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여러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하였으며, 일제로부터도 배일분자로 낙인찍혀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마지막 왕국"이라...
얼마 전 다니엘 튜더가 김란사와 의친왕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접했다. 사실 의친왕에 대해서는 풍문이나 여러 미디어에서 실제 삶과 달리 과장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도대체 다니엘 튜더가 어떤 자료를 보고 소설을 썼나 궁금했다. 그의 말로는 "5년간의 자료조사"를 과시하며 소설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음을 강조했다. 그래서 한 번 책을 펼쳐보려다 최근 조선일보 일사일언을 보고 그럴 이유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어를 할 수 있었던 그녀는 폐위된 고종의 통역관으로 일했는데, 고종은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김란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연회에서 암살자들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일보 9.30. 일사일언)
이 짧은 글을 읽고 이내 실망했다. 또 그 흔한 옛 왕족 띄우기에 불과하겠다 싶었다. 일단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김란사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2. 김란사는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연회에서 암살자들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의 밀명"이라는 주장, 근거가 있다면 한 번 공개해 보시라. 내가 알기로는 고종을 신격화하는 일부 학자나 고종의 후손들의 말 외에 어떤 증거도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상해에서 배에 올랐다. 의친왕 숭모자들은 김규식과 이강(전 의친왕)이 동문임을 강조하며 김규식도 의친왕이 보낸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 주체는 국외에서 독립에 분투했던 신한청년단이지 이강이 아니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낼 목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영입, 입단시켰다. 김규식이 상해를 떠난 날은 1919년 2월 1일로 삼일운동 전이었다. 반면 김란사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3월 7일로 삼일운동 이후, 김규식이 출발한 지 한 달도 더된 때였다. 그리고 파리강화회의는 이미 1919년 1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김란사의 최종 목적지가 파리였다면 북경에 온 것부터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유럽으로 가려했다면 해운으로는 상해, 육로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야 했다. 이미 회의가 시작된 마당에 굳이 북경으로 들어와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규식은 이미 출발한 터였으니... 일찌기 서울에서 하란사를 만난 바 있던 김동성은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그 집 주부는 곧 하란사 부인으로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출신이며 선천적으로 교재가 능란하고 손님 접대에 진선진비하였다. 그는 미국에 또 건너가 이화학당을 위해 모금도 하였거니와 미국 자동차 도시로 유명한 디트로이트 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김모씨의 희사금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정동 예배당에 장치한 일 있었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된 파이프 오르간이다. / 백상규 씨는 1905년 미국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선배로 미국 출신들과 자연히 자주 모이게 되었다. 이런 미국 출신 회합에 하란사 부인은 빠짐없이 참석하여 우의가 두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친미파로 지목받고 일본 당국의 미움이 심해졌다. 교회 일로 북경에 갔던 하란사 부인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풍설에는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우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아니한 줄 나는 추측하고 있다.”[경향신문 1967.11.8. 나의 사우록-하란사 부인:상해 망명한 부군 생사 알린 게 인연(김동성)]
위에 따르면 김란사는 교회 일로 북경에 갔다고 했다. 일단 김란사의 북경행은 고종의 밀명에 의한 것이라는 건 물론이고 파리강화회의 참석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정황상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 김동성의 글에서도 나온 살해설, 또는 독살설을 확인해 보자. 관련 자료로 당시 북경에 주재했던 일본 경찰 하타노 가메타로(波多野龜太郞) 경부가 공사관에 보고한 내용이 있다. 문서 번호는 북경수발 제609호(1919(대정8).3.20.), 제목은 "(조)선인행동에 관한 건"이다.
조선독립운동에 실패하여 이곳에 온 조선 부인이 분사했다는 기사가 익세보益世報 등에 게재되었기에 지나 측 경찰을 찾아가 취조해 보니 사망자는 아래 기록한 자로서 본월 7일에 당지에 도착해 미국교회부속 부영의원婦嬰醫院(숭문문崇文門 내성)에 입원, 동 10일 폐렴으로 사망했던 것으로 분사 등의 자살이 아니라는 것은 의사의 진단서로 입증되는 바, 사망자는 부영의원장이 조선에 있을 때부터 알던 관계로 몸을 의탁하게 된 것으로 이번 폭동에 자신과 관련한 학교의 학생 등이 참가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것은 사실로 조선인들 사이에 전하는 바로는 사인은 극약 등에 의한 자살로 확신하는 것 같음. / 경성부 정동 27번지 이화여중학교 기타 정신여학교, 배화여학교, 성경여학원, 성경전문여하교 교사(조선에서는 주로 부인교육가. 남편은 전 한국 인천부윤으로 있던 하상기) 하김씨(조선인들 사이에는 하한씨로 알려짐.) / 이상이 사건 시말임. 사후의 전보에 의거 남편 하상기는 본월 13일 북경에 도착 장로교회 내에 머물고 있음
위 글에 따르면 김란사는 3.1. 운동 이후 대거 검속을 피해 북경에 왔으며, 그녀의 죽음은 폐렴에 의한 것으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당한 것도, 그리고 교민 환영회에서 독살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교민사회에서는 분사, 독립운동에 실패하여 분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중국 신문도 분사로 기재) 여기서 파리강화회의는 언급조차 없다. 주북경일본공사관은 이 내용을 다시 일본의 외무성에 보고했다. 늘 그렇듯 일제의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다, 일제의 선동이다 하겠지만 이 문서는 비밀문서로 당시에는 일반이 열람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만일 선동이 목적이었다면 왜 매일신보 같은 데 왜 한 줄도 나오지 않았을까.
(1919년) 3월 8일 경에 현순玄楯, 최창식崔昌植이 장경여張敬予를 대동하고 북경으로 출발했다.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반점에 투숙하여 중국인(華人) 혁명가 수 명을 만나서 동아의 국세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담론하고 화우(중국인 친구)들의 권고로 나의 화명(중국식 이름)은 포경번鮑康藩으로 제명했다. 장경여와 동반하여 영국인 기자 자일(William R. Giles) 씨를 방문하고 국내에 파견카로 결정했다.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견할 때 김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영국인 심슨(Leonor B. Simpson) 씨를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정형을 말했더니 그가 국제기자단에 소개하여 중외기자 수십 인을 회견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의 해독害毒과 거국 일치로 발생한 독립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해설하여 각국 신문에 크게 선포되었다. 당시에 손정도는 북경에 먼저 와서 합달문哈達門 안에 있는 감리교회소영병원監理敎會所營病院에 유숙하고 하란사 여사도 내류 중에 우연히 유행성 감기(感冒)에 걸려 고통하다가 불행 병사하여 경성에서 그 배우자 하상기河相琦가 와서 중국인 예배당에 장례식을 행하고 북경성 밖에 안장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위는 독립운동가 현순의 일기 기록 중, "삼일운동과 우리의 사명"의 일부다. 그는 당시 북경에 체재 중이었던 만큼 김란사의 죽음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김란사가 유행성 감기에 걸려 앓다가 사망했다고 했다. 이는 위 문서의 사인 "폐렴"과도 일치한다. 사후 배우자 하상기가 도착해서 장례식을 주관했던 이야기 역시 일본 공사관 문서와 동일하다.
결론을 말하면 김란사는 파리강화회의 파견과는 무관하며 독살되지도 않았다.
1. 일제침략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카더라" 음모론은 흥밋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주장에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일제 통치의 폐해를 널리 알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바보가 되는 셈이다. (고종과 의친왕을 숭모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가짜뉴스가 대표적이다.)
2. 우리는 외국인들이 인정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외국인이 한글을 구사하거나, 혹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면 꽤나 호감을 갖는다. 외국인도 이것을 알기에 한국어만 좀 구사하면 우리의 감정을 적절히 파고들어 우리의 주머니를 털려든다.
3. 다니엘 튜더가 그런 속물은 아니리라 믿는다.
기자로 오래 생활해서 취재원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또 믿는 취재원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기사 작성의 기본 아닌가? 역사는 더더욱 말이다. 자료를 찾는 것을 포함해 내가 이 글을 쓰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5년간의 조사”, “팩션”을 강조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일사일언의 이야기만 보면 그 5년 , 그저 의친왕을 떠받드는 사람들 사이의 구전 + 간단한 사전 정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이 글을 본인이 발견한다면 "역사"라는 단어와 "출판"이라는 행동의 무게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다니엘 튜더, 당신은 김란사를 아시나요?
*다니엘 튜더의 글 원문은 아래 링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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