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15억원, 달러 빚을 내 유흥자금으로 탕진한 의친왕 이강의 호시절 본문
의화군 이강, 훗날 의친왕은 행실이 불량했다. 이는 이방자도, 윤치호도 지적한 바 있다. 일단 그에게는 낭비벽이 있었다.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의 미국 유학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목도했듯 그는 "유學"하며 공부에 별 뜻을 두지 않았다. 나라는 풍전등화에, 백성들은 주렸지만 의친왕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매년 대한제국은 그에게 매년 4,000달러를 보내주었음에도 그는 미국의 대부업자들에게 30,000달러라는 거액의 빚을 졌다.
미국신문은 동양의 작은 나라 왕자의 거대한 씀씀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진 아래 번역 있음)
돈을 기다리며
왕자의 코니아일랜드 방문, 대부업자의 청구서엔 3만 달러가.
뉴욕, 2월 6일: 한국 이희 왕(고종)의 셋째 아들인 의화군은 현재 워싱턴에 있는 한국공사관에서 아버지가 30,000 달러를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그가 대부업자들에게 진 여러 건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다. 이 돈 대부분은 코니아일랜드와 뉴욕에서 옷, 극장, 파티 등 여러 유흥에 쓰였으며 이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왕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의화군은 1900년 로어노크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에 왔으며, 매년 4,000 달러의 용돈을 받았다. 대학에서 1년간 미국의 관습과 생활방식을 두루 배우고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방문했다. 그 결과 30,000 달러를 지출하게 되었다.
그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업자에게 여러 차례 어음을 발행했고 대부업자들은 왕자가 요구하는 대로 승인해 주었다.
WAITING FOR DOUGH.
Royal Visit to Coney Island Reflected in Money Lenders’ Notes for $30,000.
NEW YORK, Feb. 6.
Prince Hui-wha, third son of King Li Hsi of Korea, is at the Korean legation in the city of Washington awaiting the aririval of $30,000 from his father that he may pay various debts contracted with money lenders. Much of this sum was spent in Coney Island and this city in clothes, theatres, banquets and various other allurements calcnlated to attract a prince only 20 years old.
Prince Huiwha was sent to this country with $4,000 a year at his command to attend the Roanoke University. This was in 1900. After a year at the university, during which time he learned a great deal of the customs and manners of the country, Prince Huniwha visited the city and incidentally Coney Island. An ultimate expenditure of $30,000 was the result.
For this amount he gave a great many notes to money lenders, who did not see fit to refuse the son of a king anything he might ask.
Durango semi-weekly herald (Durango, Colo.), February 10, 1902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은 일본인 통역에게 150달러를 환전해 달라고 했다. 잠시 뒤 일본인 통역이 환전해 온 조선 돈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1센트가 동전 15~30매 가량으로 1달러면 지게로 져야 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로버트 던이 환전한 조선 동전이다. 아마도 150달러를 환전하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정진석,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48) 1달러 환전하니 엽전 한 지게, 조선일보 2009.11.5. 참조) 의친왕이 미국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오가며 흥청망청 하느라 빌린 돈이 30,000만 불이었으니 저만큼의 엽전 200배에 해당한다.
의화군 이강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매년 4,000 달러의 용돈을 받았으나 그걸로는 모자랐다. 그 이유는 위 신문도 썼듯 "코니아일랜드와 뉴욕에서 옷, 극장, 파티 등 여러 유흥"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0 달러 빚을 냈다. 아래 사이트에 따르면 당시 달러와 지금 달러의 36.66배라고 하니, 미국에서 이강이 유흥에 탕진하느랴 빚진 돈 만 15억 3천만 원 정도 되는 셈이다. [이런 돈, 구식 군대에 썼으면 애당초 임오군란도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1902년이면 어떤 시기인가? 애비란 황제는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한다며 빅 파티에 여념이 없고 자식이란 왕자는 외국에서 돈을 물 쓰듯 하고 살았으니, 이들이야 말로 망국의 주범들 아닌가. 의친왕이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을 지휘했다는 건 후손들이 조상에 분칠하려 만들어낸 증거 하나 없는 허구이자 독립지사를 모독하는 행위다. 김란사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6년간 수학,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의화군 이강이 그 학교를 다닌 건 고작 1년이다. 그 기간 의화군은 온갖 풍문을 뿌리고 다녔다.(이 부분은 나중에 별도로 다뤄보고자 한다.) 김란사는 여성 운동에도 힘썼는데, 저런 헤픈 왕족을 보고 어찌 생각했을까? 그럼에도 일부 후손과 그들의 말에 넘어가 마치 숨겨진 역사를 찾은 듯 떠드는 이들은 이강과 김란사를 연결해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건 망상이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왜곡이다.
김란사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지 방탕한 이강이 시켜서 한 것이 절대 아니다. 김란사의 후손은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강은 일본 체재 중에도 사채를 써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래 글 참조.
'이왕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 육군부장 의친왕, 군대 해산되던 날 피서 가다. (0) | 2024.10.31 |
---|---|
Rewriting History: The Myths and Realities of Prince Yi Kang’s Legacy (0) | 2024.10.26 |
고종의 죽음을 지켜본 의사, 그리고 의친왕_고종독살? (2) | 2024.10.24 |
다니엘 튜더는 김란사를 아시나요?(하란사 독살설 비판) (1) | 2024.10.20 |
독립운동가도, 사동궁도 팔아먹은 의친왕 이강의 실체 (0) | 2024.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