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대구광역시 순종 황제 동상 철거 논란 본문
대구 달성공원 앞, 이른바 "순종황제어가길"에는 순종 황제 동상이 있다. 순종 황제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일제에게 국권을 내주기 직전인 1909년 나라 남쪽을 한 바퀴 돌며(남순南巡이라고 부른다.)이곳에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구광역시 중구청이 2017년 7억원을 투입해 세운 것이다. 보통 동상하면 세종대왕, 이순신 등 존경받을 인물을 세우는데, 순종이라니... 게다가 십분 양보해 순종의 남순을 기념해 세웠다고 하지만 순종이 대구에 머문건 채 하루(24시간)도 안된다. 그런 까닭에 동상 만들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2024년 4월 19일 다시 4억원을 들여 이 동상을 철거하고 도로로 변경(원상복구)하기로 했다. 어쨌든 썼다 지웠다 쓴 편지도 아니고, 이 괴랄할 사업에 11억원을 투입한 셈이다. 11억원이면 평균 대학등록금 680만원이라 치고, 162명에게 줄 수 있는 돈이다. 근데 또 일각에서는 동상을 이전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럼 동상 설명을 읽어보고 동상 제작의 모티브가 된 순종황제의 남순, 그 실체를 살펴보자.
설명문에 따르면,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한일병합조약 1년 전 순종황제는 대구를 방문(1909년)하게 된다. 황제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기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순종황제를 내세워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순종황제의 조각상은 당시를 재현함이 아닌 황제 즉위식의 근엄한 모습으로 암울했던 시대상황에도 굽히지 않는 민족정신을 담아내고자 한다.
설명문 문장도 엉망이지만 참 구차하다. 황제 즉위식의 근엄한 모습은 또 뭔 말인지...
순종의 남순이 기념할 일인가?
순종은 1909년 1월 4일 남순을 가겠다며 조서를 내렸다. 조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순종의 본의는 아닐 수 있으나 조서가 주작은 아니다. (분량이 꽤 된다.)
"짐은 생각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면 나라가 편안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부덕한 몸으로 부황 폐하(父皇陛下)의 밝은 명령을 받들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밤낮으로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정사를 개선하자는 큰 결심으로 원년에 종묘 사직에 공경히 맹세하고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이런 혹한을 만나 백성들의 곤궁히 더 심하여질 것은 뻔한 일이니 어찌 한시인들 모르는 체하고 나 혼자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관리(有司)들을 인솔하고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짐의 태자태사太子太師이며 통감統監인 공작公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짐의 나라에 성의를 다하면서 짐을 보좌하고 인도해 주고, 지난 무더운 여름철에는 우리 태자의 학식을 넓히기 위하여 그토록 늙은 나이에 병든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국 각지로 데리고 다닌 수고에 대해서는 짐이 언제나 깊이 감탄하고 있는 바다. 그래서 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의 급한 일을 많이 돕게 해서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하도록 기대하는 바이다. 너희 대소 신민들은 다같이 그리 알도록 하라."
이토 히로부미, 짐이 언제나 깊이 감탄하고 있는 바다.
위 조서에서도 살짝 드러나듯, 이 순행의 기획자는 이토오 히로부미다. 순종은 조서 반포 사흘 뒤인 1909년 1월 7일 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 남쪽을 돌았다. 경성 남대문역을 출발해 대구, 부산, 마산을 찍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순행에는 96명의 수행원이 따라 붙었는데, 그 가운데 28명은 일본인이었다. 1월 7일 오전 8시 10분에 출발한 열차는 당일 오후 3시 25분에 대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1월 8일 오전 9시 10분에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순종이 대구에 도착하자 관찰사 이하 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축포 21발을 쏘았다. 시가에는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게양했다. 특별히 이사관 관사 앞에는 녹문을 세우고 두 나라의 대형 국기를 문 양쪽에 걸었다. 순종이 지나가는 길에는 모래를 뿌려 길을 고르게 했다. 순종은 역을 내려 마차로 숙소인 행재소로 이동했는데,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박수치며 환호했다. (순종의 인기를 증명한다고? 오늘날 북한을 보라.) 행재소에는 지방특산물을 전시했다.
메이지 천황처럼 순종을 꾸미다
순종의 순행은 메이지 천황이 일본 각지를 순행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혹자는 일제가 조선황실을 바보로 만들었다며, 프레임 음모설을 내세운데, 하지만 결코 아니다. 일제의 입장에서 대한제국 황제는 어리석은 바보들이 아니라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한 현명한 성군이어야 했다. 그래서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든 것이, 즉 나라를 일제에 갖다 바친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군주의 현명한 결단으로 비춰지길 원했다. 이 순행 역시 그런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었으며 또한 대한제국 구황실을 대우하며 왕공의 작위, 거액의 은사금, 그리고 빛나는 훈장을 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고종(덕수궁 이태왕), 순종(창덕궁 이왕), 영친왕(왕세자), 의친왕(이강공), 흥친왕(이희공), 그들은 진정 현명한(?) 이들이었기에 누구 한 명 거절하지 않았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순종 황제의 길
그 길을 기념하며 대구광역시 중구는 동상을 세웠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시키는 대로, 일본 황태자 맞이하러 가라면 인천항까지, 또 남쪽을 돌자면 대구, 부산, 마산 찍고, 일제의 장식품처럼 살았던 식물황제 순종의 동상을 뭐러 세웠을까. 애초에 돈 써가며 만든 인간이 잘못이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 북송의 휘종이나 흠종, 아니면 서진 혜제의 동상을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
철거는 혈세 낭비고, 이전도 혈세 낭비다. 하지만 지자체의 무분별한 기념물 조성으로 인한 세금 낭비,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했던 식물황제 순종의 남순이라는 부끄럽고 뼈아픈 역사를 생각하며 세상의 반면 교사로서 어딘가에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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