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의 전 애첩 '연년이' 본문
동아일보 1921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다.
이강 공 전 애첩을 협박하고
오십원을 강탈
시내 권농동 88번지 사는 양대현梁大鉉(38세)는 정영원鄭永源(41세)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항상 상해上海 가정부(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금전을 모집하고자 시내 당주동 이강李堈 공의 전 애첩愛妾 이연연이를 협박하되 금전을 제공해야지 만일 내지 아니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연연이는 어찌 몹시 놀랐던지 오십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처에서 금전을 강탈한 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각 1년 6개월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대로 복죄하였다더라.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에게는 여러 여성이 있었다.(개벽 기사를 보면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명했던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정실이거나 자녀가 있는 분들이다. 여기 이연연이도 그중 한 명이었으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의친왕의 여성 한 분을 더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전 애첩"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사건이 있던 1921년 3월에는 갈라서서 전여친이 된 모양이다. 의친왕은 1919년 10월 상해 망명 때 애첩 최효신을 데리고 가겠다고 고집하여 출발이 지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연연이가 그 앞인지 뒤인지 아님 동시였는지는 향후 규명해야할 과제라 하겠다. 이연연이가 살았다는 당주동은 오늘날 세종문화회관 뒤쪽이니 의친왕의 집은 관훈동 사동궁과도 도보 거리였다. 이연연이는 흔히 '연년이'로 불렸을 것이다. 이름으로 볼 때는 넉넉하지 못한 자식 많은 집안의 여식이었던 듯하다. 주범인 양대현은 38세로 권동동에 살았다. 권농동은 창덕궁 아래로 종묘 담을 따라 있는 동네다. 그는 자신보다 3살 많은 정영원과 공모해 상해 임시정부 자금을 모았다. 둘은 이연연이에게 50원을 갹출했다. 당시 50원이면 나팔 달린 최신 축음기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최고급 오디오 1대 값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들은 이연연이를 마지막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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