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덕수궁 태황제, 통감부로 행차해 이토 히로부미를 조문하다 본문
우리는 으레 희망을 담아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 희망을 오래 품다 보면 마치 사실인 양 생각하며 되려 진실은 보지 않으려 한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제국 황실가문이 그 대표적 예 중 하나다. 인현왕후가 출궁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만 정작 당신의 조상은 보릿고개를 걱정했을 거다.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망한 재벌을 걱정하는 게 우리네 인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스미디어가 근거 하나 없이 고종이나 민비, 의친왕, 덕혜옹주의 독립운동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면 또 이를 본 이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그리고 몰랐던 역사를 발견한 듯 달려든다. 가끔은 이런 경우가 국제적 개망신으로 치닫게 되기도 하니,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인조이재팬 쪽팔림 사태가 그 대표라 하겠다. 몇몇의 청맹과니 같은 짓 때문에 우리 전체가 망신을 당해야 한다는 점에 심히 불쾌하다.
얼마 전에 전직 역사학자는 안중근의 의거가 고종의 밀명에 의한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이는 안중근을 모독하는 행위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고종이 어떻게 했을까. 현대어로 푼 당시 신문을 보자.
[황성신문 1909.11.3.]
잡보, 행행노차(행차 노정) : 내일 이토 (히로부미) 공 장례에 태황제 폐하(고종)께옵서 통감관저에 행행(행차)하신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당일 출궁 시각 및 동선은 다음과 같으니, 이날 상오 9시 40분에 대한문으로 나와 신작로, 황토현, 종로, 철물교, 포병, 수표교, 전 영희전 앞, 본정 5정목을 따라 통감관저에 당도해 이토 공의 조문을 행하고 동 10시 30분에 환어(귀환)하옵신다더라.
[황성신문 1909.11.6.]
태황제(고종) 행행 절차는 앞서 보도와 같이 태왕제 폐하께옵서 그제 상오 9시 40분에 통감 관저에 행행(행차)하시어 이토 공의 위문을 행하시고 동 10시 30분에 환어(귀환) 하셨는데, 그때 노부, 의장은 기병 약간과 황궁경찰계 약간이 앞뒤로 경위(호위) 했고 마차를 타셨는데 승녕부 총관 조민희 씨가 참승하고 예식관 고희성 씨가 전도하였더라.
제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망국의 군주가 목숨 제대로 부지한 경우 있던가. 이형은 태황제에서 강등되어 덕수궁 이태왕이 된 것이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태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각종 조약마다 "황제가 안 했다"를 강조하는데, 이게 자랑할 거냐. 부끄러운 거지. 실은 신하 뒤에 숨어서 거래를 한 인간들이. 비유하자만, 회사 말아먹고 인수합병된 기업의 총수가 "내가 사인 안 했어"라고 말하는 거다. 모든 건 직원의 책임으로 넘기고,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http://www.nl.go.kr/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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