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가장 고종스러운 대통령 윤석열, 가장 윤석열스러운 임금 고종 - 고종 후손과 김건희

자불어 2025. 8. 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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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후손 모씨가 김건희의 종묘 사적 유용을 비판했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김건희가 종묘를 제멋대로 사용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종묘는 왕=국가였던 시대 국가 제사가 열렸던 곳이자 문화유산이다. 정신 나간 왕비놀음 한 것이다. 하지만 고종 후손의 이야기도 비판을 면하긴 어렵다. "우리도 돈 내고 들어가는 데" 라든가, "대왕대비도 아니고", "후손에게 허락받았냐"라는 표현은 본인 스스로도 특권 의식을 갖고 종묘를 사묘처럼 생각하기에 나온 표현이다.  왕이 사라진 시대(심지어 나라를 빼앗김), 종묘는 주인은 시민이지 일개 가족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어조는 사고 측면에선 김건희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고종과 윤석열은 닮음꼴이란 사실이다. 윤석열은 고종의 환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실을 하나 씩  열거해 보겠다. 

1. #권력욕과 무책임
고종은 군주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은 일도 없었다.(일도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의 조인을 강요하자 고종은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며 신료들과 상의해 결정할 일이라며 발을 뺐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정한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국제" 조항을 인용해 "나라의 모든 권력은 황제로부터 나오는 전제국에서 당신이 서명하면 되지 무슨 신료들과 상의냐"라고 했다. 오로지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제정한 국제에 되치기 당한 셈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고종 후손이라는 모씨는 줄곧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직접 안 했고 순종은 병합 조약 조인 안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야 말로 무책임이다. 남들이 자기 도장 빼앗아 날인하는 데 어디서 뭐 하고 자빠져 있었는지. 그건 힘이 없어서 빼앗긴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어 준거다. 윤석열은 계엄을 발동하고 법원에선 자신이 동원한 군인들을 탓했다. 윤석열이 직접 국회를 봉쇄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고종과 순종, 그리고 그 자손과 뭐가 다른가. 그래서 피는 진하다 했던가.

2. #부인에게 휘둘림
고종 치세 기간 처음엔 민비가, 나중엔 엄비가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 우국지사 황현의 매천야록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고종이 내전을 들어가다가 창황히 후문으로 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고종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으나 민후閔后(민비)는,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보인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종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좌우 시녀에게 물었으나 모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 민후가 천천히 말하기를, “전각이 깊어 혹 요귀가 들끓은 것이니 액운을 쫓는 의식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한 후 더욱 기도하는 곳을 늘렸다. 고종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민후가 대전을 이와 같이 우롱한 것이다.

"우리 오빠는 바보에요."라던 김건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3. #무속에 심취함
앞서 보았듯 민비는 무속에 심취했다. 임오군란 시 구식군대에 쫓겨 충주로 피신했을 때, 한 무당이 찾아와 환궁시기를 점쳐주고 마사지도 해주었다. 성공적인 환궁 이후 민비는 이 무당을 신뢰했다. 민비는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고, 고종도 아삼륙이었었다.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주었다. (의화군과 동급인가?) 그녀는 자신이 관성제군(관우)의 딸이라며 관제묘를 지어 달라고 했고 고종은 오늘 서울과학고 자리에 북관왕묘를 지어주었다. 또한 관리의 임면에도 간여하여 출세를 꿈꾸는 이들이 그녀에게 줄을 섰다. 당연히 효과 100%였다. 우리나라 종두법 창시자로 알려진 지석영 선생이 제발 진령군 좀 끊으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음, 생각해 볼게"하고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왕이란 자리가 누구에게 모질기 힘들기 때문일까?) 지금 언론에 나오는 천공, 건진, 명태균, 노상원과 무엇이 다를까. 

4. #민의의 파괴
만민공동회라고 국사 교과서에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1898년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서구 열강의 이권 탈취에 저항하고 자주독립과 입헌정치를 기반으로 한 내정 개혁을 목표로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의 대중집회를 열었다 "만민"이라는 이름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 결과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단념시키고 일본으로부터 월미도 석탄기지도 되찾았다. 점차 만민공동회의 파워가 커지자 고종은 권력을 잃을까 두려움에 빠졌다. 친러수구파의 음모라고도 분식하지만, 실은 고종도 한 마음이었다. 고종은 보부상을 보내 강제 해산하고, 그래도 안 되니 군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죄를 아래와 같이 열거했다. 1. 내가 금지했는데 계속 모인 것. 2. 독립협회 허가해 줬음 되었지 만민공동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한 것. 3. 내가 그만하라고 했는데 갈수록 심하게 한 것. 4. 대신들을 모욕한 것. 5. 임금의 잘못은 사람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함부로 외국 공관에 투서한 것...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국회의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졸업식에서 학생의 입을 막고, 국회로 군대를 보냈던 윤석열과 무엇이 다를까.
이 시점은 망국 전 대한제국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였다. 고종은 이렇게 날려먹었다. 윤치호 같은 지식인이 훗날 친일 민족개조론자가 된 데는 고종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무슨 임금이 저 따위냐.) 

5. #자기관리 엉망
고종은 단 것을 좋아해 이가 하나도 나마 나지 않고 구취가 심했다고 전한다. 그가 갑자기 사망한 데는 당뇨도 한 몫했을 것이다. 평생 알중이로 소주를 음료처럼 마시고 안가에서도 폭탄주를 즐겼다는 누구와 무엇이 다를까.

백성들이 못마시는 커피 좋아했다고, 궁전에 전등불 놓았다고, 죽은 마누라 무덤까지 전차 깔았다고 근대군주가 아니다. 나라 잃고도 비빈 거느리고 밤새 상궁들과 놀고, (20세기 일부일처제 황족은 영친왕 밖에 없다. 의친왕이야 뭐... 이 분야에선...) 단발령 내려놓고 정작 자신은 머리 안 깎고, 관료를 포함한 백성들에게는 생사여탈권 운운 철퇴를 휘두렀지만 일본 관료들 앞에서는 비굴하기 짝이 없던 고종, 그게 무슨 근대군주인가? 고종이건, 순종이건, 파락호 의친왕이건 일본놈하고 싸우다 죽던, 아님 비분강개해 순국했다면 이 나라 입헌군주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황과 일가로 왕공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최고의 일제협력자로 활동했던 자들을 마치 오늘날 독립운동가로 또는 저항의 아이콘인냥 둔갑시키려 드는 후손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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