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일자무식, 애첩의 조카에게 군수 벼슬을 줬던 대한제국 관료 이건하

자불어 2026. 8. 17. 15:44

대한제국 관원 가운데 이건하(李乾夏, 1835~1913)라는 자가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및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국인을 구타한 외국인의 처벌을 요구하고, 울릉도에 들어와 허가 범위 이상의 벌채를 했던 일본인 벌목업자들을 돌려보내고, 간도 체류 한국인에게 변발과 호복을 착용하라는 청에 철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청구 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도 상소를 올렸다. 특히 인척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가담했음에 분노했다.

종친 이건하 씨는 이번 신조약 사건에 대해 종사가 몰락하여 사라지게 생긴 것에 분통해하며 울분을 토하며 그 자식과 조카에게 이르길, 지용은 역적이라. 집안과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패역한 종자가 나타났기로 지금부터 종친 간의 윤리를 거절하고자 하니, 즉 너희들이 내 뜻을 몸에 새겨 절대 ‘형’, ‘삼촌’이라 부르지 말고 피차 영원히 왕래를 끊으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5.11.30.)

그러나 몇 년 뒤, 그는 태도를 바꿨다.

총리대신総理大臣 이하 각부 대신이 엊그제 서강西江에 나가 이건하 씨 정자에서 힐링[消暢]하고 돌아왔더더라. (황성신문, 1908년 3월 24일자)

당시 총리대신은 이완용이었다. 인척 이지용은 멀리해도 이완용과는 웃으며 힐링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몇 년 뒤 국권 피탈 직전 그는 자신의 집에 김성근, 김학진, 민영소 등을 모아 황제와 통감에게 ‘정명분(正明分)’, ‘익기강(益起綱)’을 청원하는 상소를 준비했다. 정명분은 양반을 상민과 구분하는 것이며 익기강은 양반의 신분권을 회복해 함부러 관헌의 제약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 실행으로 옮겨졌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결국 그는 그 소원을 이뤘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관료에게 작위를 수였다. 이건하는 이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수여식에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그에게 근대 행정의 개념은 없었다. 공주부관찰사 시절, 그의 악행은 유명했다.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보고나 재판도 없이 형을 집행했다.

공주부 관찰사 이건하 보고가 6월 4일 법부에 도착했는데 화적 이홍복을 본부 참영 백락완이가 생포하여 법부에 보고 없이 5월 28일에 포살(총살)하였다니 아마 새로 난 규칙을 모르고 그리하였나 보다.(독립신문 1896년 6월 11일자)

2. 노름판을 양성했다.

연산 김씨가 신문사에 편지하기를, 공주부 관찰사 이건하가 난장을 터서 각 처에 노름이 많은데 노름꾼이 돈이 없어지면 화적이 되어 백성들이 살 수 없고 노름꾼들이 술을 취하고 패악을 부려 공주영이 아우르지 못 한다고 하였더라.(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3. 부하를 무고하다.

그 전 정산군수 윤갑병씨의 편지가 신문사에 왔는데 각골 절원한 사기를 세상에 보게 하노니 이 때 우리 나라 사세가 공평 정직 함이 창생을 위함이요 창생을 위함은 대군주 폐하를 위함이라. 박덕한 윤갑병은 본도 관찰사 이건하 씨의 불법한 정령을 듣지 아니하기를 오륙 차 하였더니 그 혐의로 포폄에 증거 없이 써서 정부에 바치고 본도 관찰부 주사 정관희를 서울 보내어 무수히 혐언을 하여 무죄한 사람을 세상 죄인을 만들기에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재판을 청구할까 하고 증거물을 가지고 서울 왔더니 혹은 관찰사로 피고를 삼지 못한다 하기로 재판도 못 하고 은혈로 분하고 원통한 바는 아무쪼록 애민 신정하여 대군주 폐하의 호대하신 은혜를 갚자고 하였더니 내종병과 등창병 만들고 일장 대소에 충청남도 인민의 사기만 탄식하며 관찰사 이건하의 관찰사 전후 하는 행적과 군수 윤갑병의 군수 노릇하던 사기를 내부에서 사실하여 주면 관찰사의 학민 한 바는 증거가 소상하고 윤갑병은 추호의 학민함이 없을 터이나 하관이 되었기로 애매한 말을 듣고 무고히 면관 되었으니 관찰사도 각 아문 대신의 애국 하는 마음을 알지 못 함이 통곡할 일이라고 하였는데(독립신문 1896년 10월 22일자)

4. 부호를 멋대로 잡아다가 갈취하고, 자리를 팔아 축재하다.

공주 관찰사 이건하 씨 정치라 노성 거부 윤상석이를 동학 여당이라고 두 번이나 잡아가놓고 징치도 안 하고 스스로 풀어준 것이 괴상하고 논산 고을 요리사를 공주 군수 서옥순씨를 시켜 오백 냥을 받아먹고 정산 고을 요리사 다섯 자리를 뺏어 세 자리는 영속의 보폐로 내주고 두 자리는 이경삼에게 이백 냥씩 받아먹고 정산 우씨 집안과 노성 당지 윤도사와 산송한 일로 처음에는 우씨 집안을 승소케 하더니 정산 영 주인 김항진이가 윤가에게 거간 하여 돈 백 냥을 공주 주사 정관희에게 주고 우씨 집안의 무덤 두 기를 팠다고 하더라.(독립신문 1896년 10월 22일자)

5. 가짜 증빙을 만들어 토지를 갈취하다.

세래의 편지가 신문사에 왔는데 신창군 북면 홍꽃 원내 신니 세 동리가 바다 조석 물에 전답이 포락 되어 백성이 이산 지경이 되었는데 그 전답 주인들이 의논하고 돈 일만 오천 이십 냥 팔전을 모아 아산군 임치재의 논 칠두락과 김석우의 논 삼십 오두락을 천 냥을 주고 사서 이세래를 맡겨 굴포 하였더니 아산 이운종이가 엄치삼과 이준영을 부동하여 공주 관찰사 이건하 씨가 조손 향열이 된 자세 하고 입안을 내고 관찰사는 아산군 신창군에 감결 하고 억지로 완문 내어 뺏기로 고등 재판소에 진정하고 또 이건하의 정치를 말하였는데 각 읍에 감결 하여 각 항 영납을 옛 규식으로 받치라 하니 관하 각 군이 부지 하기 어렵고 수령 연명을 치진 공장을 여전이 하니 인민이 부지 할 수 없어 원망이 창천하다고 하니 잊은가를 모르겠더라.(독립신문 1896년 10월 27일자)

6. 애첩의 친인척에게 관직을 남발했다.

공주군수(公州郡守) 김갑순(金甲淳) 씨는 원래 공주(公州)의 전(前) 노령(奴令, 관아의 종 우두머리) 출신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만큼 무식하고 정무(政務)에도 어두운 인물인데, 전임 공주관찰사(公州觀察使) 이건하(李乾夏) 씨 애첩(愛妾)의 조카이다. 이씨가 조카를 위해 갖가지로 청탁을 넣어 공주군수로 임명되게 하였다. 그런데 김군수가 부임하자, 관속(官屬, 관청 직원들)들이 결심하여 말하기를 "비록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다 하나, 전혀 무식한 전직 노령 출신을 어찌 '사또님(案前)'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일제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공무(公務)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군수는) 며칠 전 서울로 올라가 다른 군(郡)으로 전임하기를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31일자)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31일 "공주군수 이임을 도모"


독립신문에는 그에 대한 제보가 연이어 접수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독립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나왔다.

충청남도 관찰사 이건하 씨의 잘못한 일을 이왕 신문에 기재하였더니 이건하 씨가 그 신문을 보고 깨달아 요사이는 조심을 매우 한다니 늘 조심을 해야지 잠시 조심해서는 쓸데없을 듯하더라, (독립신문, 1896.12.3.)

함부러 조상 자랑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