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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3.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의친왕이 독립선언을?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요?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의친왕이 서명(?)했다는 "제2독립선언서"의 진실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대동단 독립선언서 사진을 게재하고 아래 설명을 부기했다.“대동단 독립선언서. 일제 치하에서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에서 평민이 되고자 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 33인 중 제일 첫 번째로 ‘의친왕’이 아닌 ‘이강’으로 서명을 한다. 전협, 김가진 등 당대..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이 '공'위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의친왕의 의병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지원 등을 보면서도 체포하지 못했던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로 압송되어 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이준은 이강이 공의 작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
전 의친왕 이강 공은 1919년 망명 기도가 실패한 뒤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주장처럼 국내여행이 일절 금지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이강 공은 예전과 같이 이곳 저곳 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송암신정기를 썼던 1928년 음력 8월(양력 9월)에도 개성을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셨다. 이태진은 1927년 "12월부터 의친왕 자신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비(警備, 감시) 대상으로 올라 사회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세종시 자료집, p.93)고 했는데, 사회생활을 금지당한 이강공이 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강 공은 1928년 3월 14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 정무총감을 조선호텔로 초대해 오찬..
의친왕 이강은 상해 임시정부의 망명 시도로 대한제국의 여타 다른 황족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시도를 제외하고 그의 독립운동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음주벽이나 축첩으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윤치호 역시 일기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친왕을 모셔가도 별반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여러 매스미디어 등에서 고종, 명성황후, 덕혜옹주 등을 독립의 아이콘으로 그려 내면서 마치 이것이 사실인냥 포장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2024년 6월 27일 시청 여민관에서 개최한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학술행사도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집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https://ww..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2024년 6월 27일 세종특별자치시 시청 여민관에서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학술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두 채의 한옥(송암 김재식 고택, 홍판서댁 - 홍순형 고택, 전 유계화 가옥)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조성하고자,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기에 발표한 사람은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 등이었다. 이날 이태진은 "의친왕 이강과 송암 김재식의 유대 관계 추적 - 황제 직속 항일 정보기구 '제국익문사' 활동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글에 의친왕과 송암 김재식의 관계는 매우 적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