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진서) 남연의 두 번째 황제, 모용초 (전편) 본문
선비족 삼대 그룹 중 하나인 모용씨가 세운 여러 연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연南燕이 있다. 이하는 남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 모용초(385~410, 재위 405~410)의 이야기로 진서 재기에 수록된 이야기다. 남연은 우리 고대 문화와도 관련이 깊다는 삼연三燕 가운데 하나다.
모용초慕容超의 자는 조명祖明으로 모용덕慕容德의 형인 북해왕北海王 모용납慕容納의 아들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업鄴(전연前燕)을 물리치고 납을 광무태수廣武太守로 삼았으나 몇 년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집을 장액張掖으로 옮겼다. 모용덕이 남정에 종군할 때 금도金刀를 남겨두고 떠났다. 모용수慕容垂가 산동에서 거병하고 부창苻昌이 모용납과 모용덕의 아들들을 잡아다 모두 죽였다. 납의 모친 공손씨公孫氏는 나이가 많아 사면받았고 납의 처 단씨段氏는 막 임신한 까닭에 처형을 집행하지 않고 군의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의 관리(獄吏) 호연평呼延平은 과거 덕의 관리였는데, 일찍이 사죄를 지었다가 덕이 풀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공손씨와 단씨를 데리고 강중羌中으로 달아났고, 그 후 초를 낳았다. 모용초가 10살이 되었을 때 공손씨가 죽었는데, 임종 시 초에게 금도를 건네주며 “천하가 태평해지면 너도 동쪽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 칼을 너의 숙부에게 전해거라.”라고 했다. 호연평은 다시 초의 모자를 데리고 여광呂光에게 달아났다. 여륭呂隆이 요흥姚興에게 항복하자 초는 양주涼州 사람들과 함께 장안으로 천사 되었다. 모용초의 모친이 초에게 말했다. “우리 모자가 온전한 것은 호연평 덕분이다. 호연평은 이제 죽고 없으나 나는 네가 그의 딸을 베필로 맞아 은혜에 보답했으면 한다.” 이에 그녀와 혼인했다. 모용초는 여러 삼촌들이 동쪽에 있어 요(흥)씨에게 등용될까 두려워 미친 척을 하며 걸식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으나 오지 요소姚紹 만이 그를 보고 특별하게 여겨 요흥에게 그를 붙잡아 두고 관직과 직위를 주라고 권했다. 징소하자 모용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겼다. 요흥이 그를 비루하다 여겨 요소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외모 안에 못생긴 골격 없다’는 속담은 틀린 말 같소.” 이 덕에 거취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모용덕(남연의 황제)이 사자를 보내 그를 맞이하자 모용초는 어머니와 처에게 알리지 않고 모용덕에게로 갔다. 광고廣固(남연의 수도)에 도착해 금도를 바치고 할머니가 임종 시 해주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모용덕이 그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慕容超字祖明, 德兄北海王納之子. 苻堅破鄴, 以納為廣武太守, 數歲去官, 家于張掖. 德之南征, 留金刀而去. 及垂起兵山東, 苻昌收納及德諸子, 皆誅之, 納母公孫氏以耄獲免, 納妻段氏方娠, 未決, 囚之于郡獄. 獄掾呼延平, 德之故吏也, 嘗有死罪, 德免之. 至是, 將公孫及段氏逃于羌中, 而生超焉. 年十歲而公孫氏卒, 臨終授超以金刀, 曰, “若天下太平, 汝得東歸, 可以此刀還汝叔也.” 平又將超母子奔于呂光. 及呂隆降于姚興, 超又隨涼州人徙于長安. 超母謂超曰, “吾母子全濟, 呼延氏之力. 平今雖死, 吾欲為汝納其女以答厚惠.” 於是娶之. 超自以諸父在東, 恐為姚氏所錄, 乃陽狂行乞. 秦人賤之, 惟姚紹見而異焉, 勸興拘以爵位. 召見與語, 超深自晦匿, 興大鄙之, 謂紹曰, “諺云, ‘妍皮不裹癡骨’, 妄語耳.” 由是得去來無禁. 德遣使迎之, 超不告母妻乃歸. 及至廣固, 呈以金刀, 具宣祖母臨終之言, 德撫之號慟.
晉書 卷128 慕容超, pp. 3175~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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