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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유언, 촉으로 가다(전편)

자불어 2023. 9. 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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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촉 땅에서 바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유언-유장 부자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사 삼국지의 편자 진수도 촉서 서두, 유비의 앞에 선주전을 두어 유언, 유장 부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그럼 이하 그 첫 번째 유언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까만색은 삼국지 본문, 하늘색은 배송지 주석)

유언劉焉의 자는 군랑君郎이며 강하江夏 경릉인竟陵人이다. 한漢 노공왕魯恭王의 후예로 장제章帝 원화元和 연간 경릉竟陵으로 이봉된 지파다. 언焉은 어려서 주군州郡에서 일했는데 종실宗室인 까닭에 중랑中郎에 배수되었으나 후에 스승 축공祝公이 죽자 벼슬을 떠났다. [배송지 의견(臣松之案): 축공은 사도司徒 축염祝恬이다.] 양성산陽城山에 살며 학문에 매진하다가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발탁되어 사도부司徒府에 벽소되고 낙양령雒陽令, 기주자사冀州刺史, 남양태수南陽太守, 종정宗正, 태상太常을 역임했다. 언焉은 영제靈帝의 정치가 쇠락하고 종실이 많이 죽자 (이렇게) 건의했다. “자사刺史, 태수太守가 뇌물을 받아 관직을 주고 (그들은) 백성을 착취하니 반란이 이어질 것이다. 청렴하고 이름있는 중신을 목백牧伯으로 파견하여 하화夏華를 지키시길 청합니다.” 언焉은 속으로 교지목交阯牧에 임명해 난세를 피하고자 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중侍中 광한廣漢 동부董扶가 사적으로 언에게 말했다. “경사京師(수도)에 난이 일어날 터인데 익주益州는 천자天子의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언이 부의 말을 듣고 다시 익주에 뜻을 두었다. 익주자사益州刺史 극검郤儉은 세금을 잡다하고 번잡하게 거두어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다. [검儉은 극정조郤正祖다.] 병주并州에서는 자사刺史 장일張壹을 살해하고 양주涼州는 자사刺史 경비耿鄙를 죽였다. 유언은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감군사자監軍使者로 나가 익주목益州牧을 다스리고 양성후陽城侯에 봉해져 세금을 거두고 법을 집행했다. [속한서續漢書: 이때 유우劉虞를 유쥬幽州로, 유언劉焉을 익주益州로, 유표劉表를 형주荊州로, 가종賈琮을 기주冀州로 보냈다. 우虞 등은 모두 해내海內의 고결한 선비였다. 종종 경卿과 상서尙書 여럿을 목백牧伯(지방관)으로 선발하여 각기 본래의 지위[秩]에 따라 임명했다. 구전舊典: 역전의 수레와 말에 적색 휘장(帷裳)을 둘렀다. 신송지안臣松之按(배송지 의견): 영제靈帝가 붕어한 뒤 의군義軍이 일어났다. 손견孫堅이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叡를 죽이고 유표劉表가 형주荊州[자사]가 된 것은 유언(이 자사가 된 것)과 같은 시기가 아니다. 한령제기漢靈帝紀: 황제가 유언을 부르자 (언이) 정국을 다스릴 방도를 펼쳤다. (황제가) 상사賞賜를 내리고 언을 익주자사益州刺史에 임명했다. 전 자사刺史 유휴劉雋와 극검郤儉은 모두 탐학・방자하고 제멋대로 거두어 들이니 끼리끼리는 내부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해도 들판은 슬픔으로 가득찼다. 유언은 도착해서 바로 전권을 거두고 법을 집행해 만인에게 보이고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니 종기를 터뜨려 독자세력을 만든 격이었다. 언焉이 명을 받아 들어가선 도로를 막고 형주荊州의 동쪽 경계에 머물렀다.] 부扶 또한 촉군서부속국도위蜀郡西部屬國都尉를 요구했고 태창령太倉令 파서巴西 조위趙韙도 관직에서 물러나 함께 따라갔다. [진수陳壽의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동부董扶는 자가茂安이다. 어려서 스승을 따라 공부하여 여러 경전에 능통했고 구양상서歐陽尙書에 뛰어났다. 또한 빙사聘士 양후楊厚를 섬겨 도참圖讖을 깊이 연구했다. 경사京師에 가서 태학太學을 유람하고 집으로 돌아와 강의를 열자 먼 곳에서도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영강永康원년 일식日蝕이 있어 조서를 내려 현량방정賢良方正한 사인을 모아 득실得失을 책문策問하였다. 좌풍익左馮翊 조겸趙謙 등이 부扶를 천거했으나 부는 병으로 나가지 않고 장안長安을 돌아다니며 상서를 올렸고 끝내는 병이 위독해졌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재부宰府에서 10회 벽소하고 공거公車에서 세 번 징소하고 다시 현량방정賢良方正, 박사博士, 유도有道로 발탁했으나 하나도 응하지 않았고 이로써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이 표表를 올려 부扶를 천거했다. “자유와 자학의 덕[游夏之德]을 자질로 공자의 학풍[孔氏之風]을 잇고 안으로는 안으로는 초연수焦延壽와 동중서董仲舒의 제재초복除災招福(재난을 막고 복을 불러들임)[焦・董消復之術]을 익혔다. 지금 병주幷州와 양주凉州가 시끄럽고 서융西戎의 반란이 빈번하니 공거公車에 칙을 내려 특별히 초치하시어 각별한 예로 대우하면 그의 생각을 기초로 뛰어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영제靈帝가 (동)부扶를 징소하여 시중侍中의 벼슬을 내렸다. 조정에서 유학의 정통[儒宗]으로 칭송했고 인재로 매우 촉망받았다. 촉군속국도위蜀郡屬國都尉가 되었으나 부扶가 부임하고 1년 뒤 영제靈帝가 죽고 천하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다. 훗날 벼슬에서 물러나 향년 82세로 집에서 죽었다. 애초부터 부가 글로 논쟁이 붙으면 익부益部에서 상대할 이가 적어 호를 “그쳐”(致止)[至止]라고 했으니, 말하는 이가 당해낼 재간이 없어 결국 이야기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진복秦宓에게 (동)부의 장점을 묻자 복이 답했다. “동부董扶는 선善은 터럭만큼[秋毫之善]이라도 높이 샀고 악惡티끌만큼일지라도 싫어했습니다.”]

劉焉字君郎, 江夏竟陵人也, 漢魯恭王之後裔, 章帝元和中徙封竟陵, 支庶家焉. 焉少仕州郡, 以宗室拜中郎, 後以師祝公喪去官. [臣松之案:祝公, 司徒祝恬也.] 居陽城山, 積學教授, 舉賢良方正, 辟司徒府, 歷雒陽令・冀州刺史・南陽太守・宗正・太常. 焉覩靈帝政治衰缺, 王室多故, 乃建議言:「刺史・太守, 貨賂爲官, 割剝百姓, 以致離叛. 可選清名重臣以爲牧伯, 鎭安方夏. 」焉內求交阯牧, 欲避世難. 議未即行, 侍中廣漢董扶私謂焉曰:「京師將亂, 益州分野有天子氣. 」焉聞扶言, 意更在益州. 會益州刺史郤儉賦斂煩擾, 謠言遠聞, [儉, 郤正祖也.] 而并州殺刺史張壹, 涼州殺刺史耿鄙, 焉謀得施. 出爲監軍使者, 領益州牧, 封陽城侯, 當收儉治罪; [續漢書曰: 是時用劉虞爲幽州, 劉焉爲益州, 劉表爲荊州, 賈琮爲冀州. 虞等皆海內清名之士, 或從列卿尙書以選爲牧伯, 各以本秩居任. 舊典:傳車參駕, 施赤爲帷裳. 臣松之按:靈帝崩後, 義軍起, 孫堅殺荊州刺史王叡, 然後劉表爲荊州, 不與焉同時也. 漢靈帝紀曰: 帝引見焉, 宣示方略, 加以賞賜, 敕焉爲益州刺史. 前刺史劉雋・郤儉皆貪殘放濫, 取受狼籍, 元元無聊, 呼嗟充野, 焉到便收攝行法, 以示萬姓, 勿令漏露, 使癰疽決潰, 爲國生梗. 焉受命而行, 以道路不通, 住荊州東界.] 扶亦求爲蜀郡西部屬國都尉, 及太倉令(會)巴西趙韙去官, 俱隨焉. [陳壽益部耆舊傳曰: 董扶字茂安. 少從師學, 兼通數經, 善歐陽尙書, 又事聘士楊厚, 究極圖讖. 遂至京師, 游覽太學, 還家講授, 弟子自遠而至. 永康元年, 日有蝕之, 詔舉賢良方正之士, 策問得失. 左馮翊趙謙等舉扶, 扶以病不詣, 遙於長安上封事, 遂稱疾篤歸家. 前後宰府十辟, 公車三徵, 再舉賢良方正・博士・有道皆不就, 名稱尤重. 大將軍何進表薦扶曰: “資游・夏之德, 述孔氏之風, 內懷焦・董消復之術. 方今并・涼騷擾, 西戎蠢叛, 宜敕公車特召, 待以異禮, 諮謀奇策.” 於是靈帝徵扶, 即拜侍中. 在朝稱爲儒宗, 甚見器重. 求爲蜀郡屬國都尉. 扶出一歲而靈帝崩, 天下大亂. 後去官, 年八十二卒于家. 始扶發辭抗論, 益部少雙, 故號曰(致止)〔至止〕, 言人莫能當, 所至而談止也. 後丞相諸葛亮問秦宓以扶所長, 宓曰: “董扶褒秋毫之善, 貶纖芥之惡.”]


三國志 卷31 蜀書1 劉二牧傳(劉焉), p.865.
 
(후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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