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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전편)

자불어 2023. 9. 11.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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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한 뒤, 모용운 정권을 고스란히, 국호까지 물려받았다. 풍발은 신도信都 사람으로 기록 상 한족漢族이었으나 이민족 국가를 인수했기 때문에 재기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후연後燕 모용씨 왕족들과 한 권에 입전된 반면, 풍발 이하 북연 군주는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뒤에 실렸다. 전, 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풍발 馮跋

 

풍발馮跋은 자가 文起로 장락長樂 신도信都 사람이다. 어렸을 적의 자는 걸직벌乞直伐로 그 필만畢萬의 후손이다. 만萬의 자손이 풍향馮鄉을 채읍(영지)으로 받아 이것으로 씨를 삼은 것이다. 영가의 난(永嘉之亂) 때 발의 조부 화和가 상당上黨으로 피난했다. 부친 안安은 무력이 출중하고 도량이 넓어 모용영慕容永 때 장군將軍이 되었다. 모용영이 멸망하자 발은 동쪽의 화룡和龍으로 이사하여 장곡長谷에 정착했다. 어려서 뜻이 깊고 말수가 적었으며 인자하고 관대했다. 술을 잘 마셔서 한 말을 마셔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세 동생은 모두 협객으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오직 풍발 만은 공손하고 신중하며 집의 자산(관리)에 힘쓰니 부모가 기특하게 여겼다. 거처하는 곳마다 매번 누각 같은 구름이 피어 당시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한 번은 밤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신령한 빛이 밝아지며 집안을 촛불 킨듯 밝혔다. 모용보慕容寶가 임금을 자처한 뒤 중위장군中衞將軍에 배수했다.

애초에 풍발의 동생 풍소불馮素弗이 종형 만니萬泥 등 여러 소년을 데리고 물가에서 노는데, 금룡金龍 한 마리가 물 위로 올라왔다가 들어갔다. 소불이 만니에게 “저런 거 본 적 있어?”라고 하자 만니 등이 모두 “본적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용龍을 잡아 와 보여주자 다들 보통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 했다. 모용희慕容熙가 이를 듣고 가져와 보라고 했으나 풍소풀이 숨겼다. 모용희는 원한을 품었고 이후 즉위하자 몰래 풍발 형제를 죽이려 했다. 얼마 뒤 풍발은 모용희가 금지한 것을 어겼고 풍발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여러 동생들과 함께 산택山澤으로 달아났다. 매일 밤 홀로 다녔는데 맹수가 항상 길을 피해다녔다. 이때 부역이 번잡하고 잦아 사람들이 명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발의 형제가 계획을 꾸몄다. “모용희는 혼미하고 포악하고 게다가 우리 형제를 미워합니다. 이제 머리를 돌려도 방법이 없으니 앉아서 죽임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때를 살펴 거병하여 공후의 업을 세워야 합니다. 성공을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드디어 만니萬泥 등 22인과 함께 모의했다. 풍발과 두 형제는 가마를 타고 부인에게 수레를 몰게 해 몰래 용성龍城으로 들어가 북부北部 사마손호司馬孫護의 집에 숨었다. 결국 모용희를 살해하고 고운高雲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모용운이 풍발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녹상서사錄尙書事 무읍공武邑公으로 삼았다.

풍발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말하다 갑자기 왼팔에서 피가 나오자 발이 이를 불길하게 생각했다. 종사중랑從事中郎 왕수王垂가 이는 천명이 감응한 것(符命之應)이라고 하자 풍발은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모용운이 환관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살해당하자 풍발은 홍광문洪光門에 올라가 정변을 바라봤다. 장하독帳下督 장태張泰와 이상李桑이 풍발에게 말했다. “저놈들의 세력이 어찌 여기까지 오겠소. 공을 위해 그들을 참하겠습니다.” 이에 칼을 뽑아 들고 아래로 내려가 이상이 이반의 머리를 베어 서문西門에 걸고 장태는 건물 안에서 도인을 죽였다. 무리가 풍발을 주군으로 추대하자 풍발이 말했다. “범양공范陽公 풍소불馮素弗은 재략이 남다르고 난을 평정하는 데 뜻을 두었으니 흉악한 무리를 제거한 것은 모두 공의 공훈이오.” 풍소불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부형이 천하를 차지해 자제에게 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자제가 부형의 업적을 가리고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직 기반을 다지지 못한 상황에서 극심한 위기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하늘이 만들어 주신 것을 헛되이 보낼 수 없으니 이 일은 대형大兄께 달려 있습니다. 바라오니 위로는 황천의 명령에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에 따르십시오.” 군신이 간청하자 결국 허락했다. 이에 태원太元20년(395) 창려昌黎에서 천왕天王의 자리에 올라 옛 명칭을 바꾸지 않으니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하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평太平이라고 했다. 사신을 보내 군국郡國을 순행하게 하여 풍속을 살피게 했다. 조부 풍화馮和를 원황제元皇帝로, 부친 풍안馮安을 선황제宣皇帝로, 모친 장씨張氏를 태후太后로 추존했다. 처 손씨孫氏는 왕후王后, 아들 풍영馮永은 태자太子가 되었다. 동생 풍소불을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풍홍을 시중侍中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급군공汲郡公으로, 종형從兄 만니萬泥를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유평이주목幽平二州牧으로, 무은제務銀提를 상대장군上大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손호孫護를 시중侍中 상서령尙書令 양평공陽平公으로, 장흥張興을 위장군衞將軍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영녕공永寧公으로, 곽생郭生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영우위장군領右衞將軍 진류공陳留公으로, 종형의 아들 유진乳陳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병청이주목并青二州牧 상곡공上谷公으로, 요소姚昭를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사례교위司隸校尉 상당공上黨公으로, 마불근馬弗勤을 이부상서吏部尙書 광종공廣宗公으로, 왕난王難을 시중侍中 무군장군撫軍將軍 영천공潁川公으로 삼고 그 나머지도 관직을 배수하고 각기 차등을 두어 자리로 나가게 했다. 얼마 뒤 만니가 표에 항의하며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 풍발이 말했다. “외람되게 부덕한 몸이 군신들에게 잘못 추대되긴 했지만 형제들과 행복과 불행을 함께할 생각입니다. 이제 채 혼란으로 안정되지 못한 마당에 황족에게 붕한 중요한 자리는 친척의 도리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지금 그 자리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국방(折衝禦侮)은 나라의 울타리이니 비록 다른 사람이 있어도 우리 형제만 못할 것이니 그 청을 어찌 들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주었다.

의희義熙6년(410) 풍발이 조서를 내렸다. “옛날 고조高祖는 의제義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함으로써 천하에 인仁을 되돌렸다. 나는 고운高雲과 의리로는 군신이오, 은혜로는 형제 이상이다. 예의를 갖춰 운과 그 처자의 장례를 치러주고 운의 사당을 구정韮町에 짓고 원읍園邑 20집을 두어 사시마다 제사를 올리게 하라.”

풍발이 즉위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니萬泥, 유진乳陳이 자신들이 친척이며 대공大功의 관계인 만큼 마땅히 공보公輔가 되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풍발은 둘 모두 지방장관으로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고 소원하게 다루지 않았으나 모두 서운해 했다. 유진乳陳은 성격이 조급하고 괴팍하나 무력이 출중해서 몰래 만니에게 말했다. “유진에게 훌륭한 계책이 있어 숙부와 함께 도모하고 싶습니다.” 만니가 결국 백랑白狼에게 달아나 병사를 막고 반란을 일으켰다. 풍발이 풍홍馮과 장군 장흥張興에게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했다. 풍홍이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 “옛날 형제가 풍운의 기운을 타고 날개를 어루만져 일어섰습니다. 군공께서는 천명이 내린 것이고 인망이 달린 것이라 하며 주상을 추대하여 보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땅을 나누어 벼슬을 내린 것은 응당 형제와 함께하고자 한 것인데 어찌 국경에서 병란을 일으켜 형제간 우애를 저버리고 알백閼伯이 되려 하십니까! 실수는 고치는 것이 중요하니 이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마땅히 혐의를 거두고 함께 왕실을 돌봅시다.” 이에 만니가 항복하고자 했지만 유진이 검을 빼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대장부의 생사는 명에 딸린 것인데 어찌 항복을 말합니까!” 결국 때맞춰 출전했다. 장흥이 풍홍에게 말했다. “적이 내일 출전하니 오늘 밤 필시 우리 군영을 소란스럼게 할 것입니다. 삼군에게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명하십시오.” 풍홍이 극비로 하여 사람들에게 건초 10속을 부과하고 불을 준비하게 한 뒤 복병을 두어 대비했다. 이날 밤 유진이 과연 장사 1천명을 보내 군영을 공격했다. 무리가 일시에 불을 일으키고 복병이 요격하자 하나도 남김없이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유진 등이 두려워 나와서 항복하자 풍홍이 그들을 모두 참수했다. 풍소불을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요서공遼西公으로 고쳐 봉했다. 풍홍馮弘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고 중산공中山公으로 고쳐 봉했다.

晉書 卷125 馮跋, pp.3127~3129.

(후편에 계속)

 

(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후편)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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