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전편) 본문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아니라 서역, 대 토번전에서도 활약했다. 당 전기 장수 돌려막기의 대표적 카드로 활용되었던 장수다. 이는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 전, 후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설인귀薛仁貴는 강주絳州 용문인龍門人이다. 정관貞觀 말년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친정親征하자 인귀仁貴가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에게 응모應募하여 종군하겠다고 청했다. 안지安地에 도착해 낭장郎將 유군앙劉君昂이 적에게 포위되어 다급해지자 인귀가 구하러 갔다. 말을 잽싸게 달려 도착해 손수 적장의 머리를 베고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자 적들 모두 두려움에 떨며 항복했다. 이 일로 인귀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대군이 안지성安地城을 공격하자 고려高麗의 막리지莫離支가 장수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에게 병사 25만을 거느리고 방어하게 했다. (이들은) 산을 뒤로 하고 군영과 군영을 연결했다. 태종이 여러 장수에게 각기 명령하여 사면에서 공격하게 했다. 인귀가 자신 만만해 하며 용맹함을 내세워 공을 세울 생각에 남다르게 흰 옷을 입었다. 창(戟)을 쥐고 허리에 장궁長弓을 차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돌진하는 곳마다 무주공산이 되자 적들이 모두 우왕좌왕하며 달아났다. (이어) 대군이 당도하니 적진이 완전히 무너졌다. 태종이 멀리서 바라보다 흰 옷을 입고 선봉에 나선자가 누구냐며 파발을 보내 묻고 특별히 불러들여 말 2필과 견 40필을 하사하고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하고 운천부과의雲泉府果毅로 발탁했다. 이어 북문장상北門長上에 임명하고 포로 10인을 하사했다. 철군 후 태종이 “짐의 옛 장수가 모두 연로하여 멀리 내보내기 어려워 매번 용맹한 이들을 선발하려 했으나 경만한 사람이 없었다. (짐은) 요동을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경을 얻어 기쁘다.”라고 했다. 얼마 뒤 우령군낭장右領軍郎將으로 승진하고 북문장상北門長上은 그대로 하게 했다.
薛仁貴, 絳州龍門人. 貞觀末, 太宗親征遼東, 仁貴謁將軍張士貴應募, 請從行. 至安地, 有郎將劉君昂爲賊所圍甚急, 仁貴往救之, 躍馬徑前, 手斬賊將, 懸其頭於馬鞍, 賊皆懾伏, 仁貴遂知名. 及大軍攻安地城, 高麗莫離支遣將高延壽・高惠真率兵二十五萬來拒戰, 依山結營, 太宗分命諸將四面擊之. 仁貴自恃驍勇, 欲立奇功, 乃異其服色, 著白衣, 握戟, 腰鞬張弓, 大呼先入, 所向無前, 賊盡披靡卻走. 大軍乘之, 賊乃大潰, 太宗遙望見之, 遣馳問先鋒白衣者爲誰, 特引見, 賜馬兩匹・絹四十匹, 擢授游擊將軍・雲泉府果毅, 仍令北門長上, 并賜生口十人. 及軍還, 太宗謂曰: “朕舊將並老, 不堪受閫外之寄, 每欲抽擢驍雄, 莫如卿者. 朕不喜得遼東, 喜得卿也.” 尋遷右領軍郎將, 依舊北門長上.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호삼성胡三省 주석] 안시安市는 한漢의 옛 현으로 요동군遼東郡에 속했다. 설인귀전에서는 ‘안지성安地城’으로 나온다.
영휘5년(654) 고종이 만년궁萬年宮에 행군하자 첫날 밤 산에서 물이 갑자기 쏟아져 현무문玄武門에 부딪히자 숙위했던 이들이 죄 흩어졌다. 인귀가 말했다. “어찌 천자가 위급한데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더니 문 위에 올라가 소리쳐 궁내에 위험을 알렸다. 고종이 급히 나와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잠시 뒤 물이 침전寢殿까지 흘러들었다. 상이 사신을 보내 인귀에게 말했다. “경 덕분에 익사를 면하고나니 비로소 (누가)충신인지를 알겠소.” 이에 어마御馬 한 필을 하사했다.
永徽五年, 高宗幸萬年宮, 甲夜, 山水猥至, 衝突玄武門, 宿衞者散走. 仁貴曰: “安有天子有急, 輒敢懼死?” 遂登門桄叫呼以驚宮內. 高宗遽出乘高, 俄而水入寢殿, 上使謂仁貴曰: “賴得卿呼, 方免淪溺, 始知有忠臣也.” 於是賜御馬一匹.
소정방蘇定方이 (아사나)하로賀魯를 토벌하자 이에 인귀가 상소했다. “신이 듣자니 병사를 내보내는 데 명목이 없으면 일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흉악한 무리가 누구인지 분명히 하면 적은 복종한다고 합니다. 지금 니숙泥熟이 적통에 의지하고 있으나 하로를 복종시킬 수 없어 적들에게 파멸되고 처자가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중국의 군대[漢兵]가 하로의 제 부락에서 니숙의 가족들을 붙잡아 천민으로 삼으려 한다는데, 반드시 찾아내 송환하고 여기에 더해 재물도 딸려 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못 몰락한 이들을 가련히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하로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폐하의 덕택이 멀리까지 미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고종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니숙의 가구를 송환하자 니숙 등이 (당)군과 함께 죽음으로 절의를 다할 것을 청했다.
蘇定方之討賀魯也, 於是仁貴上疏曰: “臣聞兵出無名, 事故不成, 明其爲賊, 敵乃可伏. 今泥熟仗素幹, 不伏賀魯, 爲賊所破, 虜其妻子. 漢兵有於賀魯諸部落得泥熟等家口, 將充賤者, 宜括取送還, 仍加賜賚. 即是矜其枉破, 使百姓知賀魯是賊, 知陛下德澤廣及也.” 高宗然其言, 使括泥熟家口送還之, 於是泥熟等請隨軍効其死節.
현경2년(657) 인귀仁貴에게 조서를 내려 정명진程名振을 부사로 삼아 요동遼東을 경략經略케 했다. 고려高麗 귀단성貴端城에서 3천 급을 참수했다. 이듬해 다시 양건방梁建方・계필하력契苾何力과 함께 요동으로 가서 고려의 대장大將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웠는데, 인귀仁貴가 필마로 먼저 돌입하니 활시위 소리에 모두 쓰러졌다. 고려에 활을 잘 쏘는 이가 있어 석성石城에서 아래로 활을 쏘았는데, 인귀가 단기單騎로 달려들자 적의 화살은 모두 빗나갔고 이내 손쓸 새도 없이 사로잡혔다. 얼마 뒤 다시 신문릉辛文陵과 함께 흑산黑山에서 거란을 격파하고 거란왕契丹王 아복고阿卜固 등 여러 수령을 동도東都로 데려왔다. 그 공으로 하동현남河東縣男에 봉해졌다.
顯慶二年, 詔仁貴副程名振於遼東經略, 破高麗於貴端城, 斬首三千級. 明年, 又與梁建方・契苾何力於遼東共高麗大將溫沙門戰於橫山, 仁貴匹馬先入, 莫不應弦而倒. 高麗有善射者, 於石城下射殺十餘人, 仁貴單騎直往衝之, 其賊弓矢俱失, 手不能舉, 便生擒之. 俄又與辛文陵破契丹於黑山, 擒契丹王阿卜固及諸首領赴東都, 以功封河東縣男.
舊唐書 卷83 薛仁貴, pp.2780~2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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