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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후편)

자불어 2023. 9. 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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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한 뒤, 모용운 정권을 고스란히, 국호까지 물려받았다. 풍발은 신도信都 사람으로 기록 상 한족漢族이었으나 이민족 국가를 인수했기 때문에 재기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후연後燕 모용씨 왕족들과 한 권에 입전된 반면, 풍발 이하 북연 군주는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뒤에 실렸다. 전, 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전편)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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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계속)

발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근자에 일이 많이 터져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보니 부역은 번잡하고 혹독해져 백성들이 곤궁해졌다. 그런 만큼 너그러운 정치를 펼쳐 일처리를 간략히 하고 과거의 학정은 모두 없애도록 하시오. 고을의 수령들은 은혜로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침해해서는 안 될 것이니 난대蘭臺 도관都官은 더더욱 밝게 살피시기를 바라오.” 애당초 모용희가 패망할 때 공인工人 이훈李訓이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 보물의 가치는 거만에 달했는데, 훈은 이것을 마불근馬弗勤에게 넘겼고 불근弗勤은 훈을 방략령方略令으로 삼았다. 이에 임용되지 못한 선비가 궐하 비석에 이 사실을 써놓았다. 풍소불이 이를 발에게 말해 불근을 면직 시키고 죄를 추궁하기를 청했다. 풍발이 말했다. “대신이 충성스럽고 맑은 절개가 없으면 조정에서 재화가 공공연히 오갑니다. 비록 내가 두루 살피지 않아 일어난 일이나 불근은 이를 시장에서 거래했으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소. 그러나 지금은 국가를 막 창업한 터 규범을 갖추지 못했소. 불근은 한미한 곳에서 발탁했으니 군자의 뜻 같은 건 없을 것이니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오. 이훈李訓은 소인으로 조정의 선비를 욕보이게 했으니 동시(東市: 사형장)로 보내야 할 것이오.” 이에 상하가 숙연해지고 뇌물로 청탁하는 일이 사라졌다.

유연蝚蠕 용곡률勇斛律이 사신을 보내 풍발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요구하며 말 3천필을 바쳤다. 풍소불 등이 논의해 말했다. “전대의 옛일을 보면 모두 종실의 여성을 육이六夷에게 시집보낼 때는 비빈妃嬪의 딸만 허용했습니다. 낙랑공주는 그리 지위를 낮출 수 있는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풍발이 말했다. “여성은 태어나 지아비를 따라가는 것이니 천 리가 어찌 멀다하겠소. 짐은 신뢰를 중히 여기는데 어찌 그를 속이겠소!” 이에 허락했다. 유격游擊 진도秦都에게 기병 2천을 데리고 딸을 유연까지 전송하게 했다. 고막해庫莫奚의 우출고진虞出庫真이 3천여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교역을 청하며 말 천 필을 바쳤다. 이를 허락하고 영구營丘에 (교역장을) 두었다.

사신을 군국郡國으로 파견해 순행하게 하여 고아, 노인,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자 등 자립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곡식과 옷감을 차등있게 나눠주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자로 성실하게 농사지은 자, 규방의 여성으로 화목하고 순종적인 자들을 찾아 모두 상을 내리고 널리 알리게 했다. 창려昌黎 학월郝越, 영구營丘 장매성張買成, 주조周刁, 온건덕溫建德, 하찬何纂을 현량賢良으로 모두 발탁해 관리로 임용했다. 태상승太常丞 유헌劉軒을 보내 북부인北部人 500호를 장곡長谷으로 이주시키고 조부祖父의 원읍園邑(무덤을 관리하는 마을)을 조성했다. 태자太子 영永에게 대선우大單于를 영요하게 하고 사보四輔를 설치했다. 풍발은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마음을 다해 정치를 하고자 요역을 줄이고 부세를 가볍게 하고 농사에 나태한 자는 죽이고 힘쓰는 자에게는 상을 주라는 조서를 내리고 상서尙書 기달紀達에게 명해 이를 법(條制)으로 규정하게 했다. 매번 지방관을 불러보아 친히 동당東堂에서 접견하며 통치(政事)의 요체를 묻고 숨김 없이 모든 이야기를 다 하게 하여 그 뜻을 보였다. 이에 중앙과 지방(朝野)이 권면하기를 앞다퉜다.

앞서 하간인河間人 저광褚匡이 풍발에게 말했다. “폐하의 성덕이 때에 감응하여 용이 동하로 날아드니 옛 나라의 일족들이 조양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하루를 한 해 보내 듯하고 있습니다. 신더러 가서 맞이하라 하시면 멀다 않고 올 것입니다.” 풍발이 말했다. “단절된 영역인 데다 수천 리를 돌아가야 하는데, 어찌 불러들일 수 있겠소?” 광이 말했다. “장무군은 바다에 임해 뱃길로 바로 연결되어 요서遼西 임유臨渝에서 나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발이 이를 허락하여 광을 유격장군游擊將軍 중서시랑中書侍郎에 배수하고 재물을 넉넉하게 줘서 보냈다. 광이 발의 종형 買, 종제 도睹와 함께 장락長樂에서 5천여 호를 데리고 내분했다. 매를 위위衞尉로 삼고 성양백城陽伯에 봉하고 도를 태상太常으로 삼고 고성백高城伯에 봉했다.

거란契丹 고막해庫莫奚가 항복해 그 대인을 귀선왕歸善王에 임명했다.

발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지금 나라에 우환이 없어 백성들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데 논밭이 황폐하고 관리가 수시로 살피지 않으니 집마다 넉넉하게 하려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뽕나무(桑)와 산뽕나무(柘)의 이익은 생산의 근본이다. 이 땅에는 뽕나무가 적어 백성들이 그 이익을 누릴 수 없으니 백성에게 뽕나무 100그루, 산뽕나무 20그루를 심게 하라.” 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성인이 예를 제정하며 죽음을 보내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 옷과 이불(衣衾)을 가득 담고 관곽棺槨을 튼튼하게 만드는 건 무엇에 쓰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니 아침에 죽으면 저녁에 묻는 것은 춥고 더울 때를 가리지 않으니 수놓은 비단으로 옷 입히고 얇은 사라로 덮어준다 한들 어찌 알겠는가! 후히 장사를 치르고 비싸게 개장하는 것은 모두 망자에게 무익한 일이오, 산 자에겐 손해가 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조상은 옛 제도에 따라 사당을 세우되 절대로 능침을 고쳐 조성하지 말라. 경내에 선포하고 지금부터 모두 이 영을 받들도록 하라.”

북위의 사신 경이耿貳가 입국하자 발이 황문랑黃門郎 상루常陋를 보내 길에서 맞이하게 했다. 발이 (북위에) 신종하지 않자 성을 내며 (인사하지 않고) 지나쳐갔다. 도착하자 발이 다시 루를 보내 노고를 위로했으나 경이는 화가 나서 인사를 받지 않았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신수申秀가 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경이를 예우하셨거늘 감히 교만하기 이를 데 없으니 받아주지 마십시오.” 중급사中給事 풍의馮懿가 아첨으로 총애를 받고 있던 차 다시 이의 오만함을 거론했다가 풍발을 격노하게 했다. 풍발이 말했다. “각기 뜻이 있는 법이오. 필부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군주가 되어서야!” 그를 가둬두고 굴복시키고자 청하자 풍발이 이경이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우물이 3일간 말랐다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상서령尙書令 손호孫護의 집안 마당에서 개와 돼지가 교접하는 일이 있었다. 호가 이를 보고 불길하게 여겼다. 태사령太史令 민상閔尙에게 점을 치게 했다. 상이 말했다. “개와 돼지는 다른 종류로 둘이 교접했다는 것은 천성을 어기고 본질을 잃었다는 것으로 홍범洪範에서 견화犬禍라 한 것으로 장차 난이 일어나 무리를 잃고 패망할 징조입니다. 명공께서는 재상(冢宰)으로 몹시 높은 자리에 계시니 주변이 모두 바라보고 있고 여러 동생들 모두 열후에 봉해져 존귀하기로 왕실에 버금가는데 마을에서 요상스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공께서는 충분히 이루신 것을 잃지 않도록 살피시고 공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도록 힘쓰시면 요상하고 괴이한 일은 이내 사라지고 오랫동안 길함을 누리실 겁니다.” 호는 숙연해 하며 더 말을 하지 않았으나 내심 불쾌해했다.

창려윤昌黎尹 손백인孫伯仁과 호護의 동생 질지叱支, 질지의 동생 을불乙拔 등은 모두 재능이 있는 데다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풍발이 즉위하고 모두 개부開府하기를 희망했으나 발이 허락하지 않자 원망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조회나 잔치가 있을 때마다 늘 검을 빼서 기둥을 찍고 말했다. “대업을 일으키는데 공력을 쏟았건만 허접한 장수 자리에나 있게 하니 이게 어찌 한나라(漢朝)가 나라를 오랫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논공행상)이라 하겠는가!” 발이 분노해 그들을 사형에 처하고 호護를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임명해 위로했다. 세 동생이 모두 죽자 호護는 늘상 원한을 품고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발이 노하여 그에게 짐주(酖酒: 독약)을 내렸다. 얼마 뒤 요동태수遼東太守 무은제務銀提가 자신은 손호孫護나 장흥張興보다 더 많은 공을 세웠는데 변방[변군邊郡]으로 보낸다며 표表를 받길 거부하고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며 몰래 반란을 꾀했다. 발이 노하여 그를을 죽였다.

풍발이 조서를 내렸다. “무력으로 난을 평정하고 문화로 나라를 다스려 나라를 편하게 하고 풍속을 가지런히 한다는 것은 진실로 믿을만하다. 최근 세상이 어지러워 예악이 붕괴하고 마을에서는 노랫소리가 끊기고 후손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없어 자금子衿(시경의 편명으로 난세에 폐허가 된 학교의 모습을 노래한 시)의 한탄이 지금 다시 나오고 있다니 훌륭한 글과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고자 한다면 문장을 숭상해야 할 것이오! 태학太學을 건립해 장락長樂 유헌劉軒, 영구營丘 장치張熾, 성주成周 탁숭翟崇을 박사낭중博士郎中으로 삼고 2천석 이하 제자들로 나이 15세 이상을 선발하여 가르치게 하시오.”

풍발의 동생 풍비馮丕가 앞서 난을 일으켰다가 고구려로 달아났다. 풍발이 그를 다시 맞아들여 용성龍城에 도착하자 좌복야左僕射 상산공常山公으로 삼았다.

유연蝚蠕 곡률斛律이 그 동생 대단大但에게 쫓겨 일가족을 데리고 풍발에게 달아났다. 이에 요동군遼東郡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를 빈객의 예(客禮)로 대우했다. 발이 그의 딸을 소의昭儀로 삼았다. 이때 여름 5월이 될 때까지 3개월간 비가 내리지 않았다. 곡률이 상서하여 새북塞北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발이 말했다. “나라를 버리고 만리를 떠나왔으니 내부에서 응원하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강병을 갖춰 보내드려도 군량을 공급하기 어렵습니다. 병력도 적으니 그 힘이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리를 공격하는 것도 옛 사람은 어려워했건만 하물며 수천 리나 되지 않습니까!” 곡률이 간청했다. “대군을 번거롭게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기병 300이면 족합니다. 칙륵국敕勒國에 도착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필시 기쁜 마음으로 맞으러 나올 것입니다.” 이에 허락하고 선우전보單于前輔 만릉萬陵에게 기병 300기를 이끌고 따라가게 했다. 만릉이 장거리 원정을 못마땅하게 여겨 흑산黑山에 도착해 곡률斛律을 죽이고 돌아왔다.

진晉의 청주자사青州刺史 신영申永이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왔다. 풍발이 답례로 그의 중서랑中書郎 이부李扶를 사신으로 보냈다. 유연蝚蠕 대단大但이 사신을 보내 말 3천필, 양 1만 마리를 보냈다.

붉은색 기운이 사방에 감돌자 태사령太史令 장목張穆言이 풍발에게 말했다. “병란의 기운입니다. 지금 대위大魏(북위)의 위세가 육합六合을 제어하고 있는데 사절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경계를 마주한 이웃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의를 어기고 이웃과 다투면 망하는 길입니다. 응당 전에 왔던 사신을 돌려보내시고 화약을 맺고 동맹하시지요.” 풍발이 말했다. “내 그러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위나라 군대가 당도하자 선우우보單于右輔 고니古泥에게 기병을 이끌고 가 살펴보게 했다. 성에서 15리 거리에서 군과 마주치자 달아나 돌아왔다. 다시 장수 요소姚昭, 황보궤皇甫軌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으나 궤軌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북)위가 방비를 갖추고 군대를 돌렸다.

풍발의 영토에서 지진과 산사태가 나고 홍광문洪光門의 문루(鸛雀)가 무너졌다. 다시 지진이 일어나 우침右寢이 허물어졌다. 풍발이 민상閔尙에게 말했다. “여느 해에 비해 땅이 움직이는 변괴가 많으니 경이 그 이유를 밝혀보시오.” 상이 말했다. “땅은 음陰으로 백성을 주관합니다. 진동은 좌우가 있는데, 진동이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니 신은 백성이 서쪽으로 옮겨갈까 걱정합니다.” 발이 말했다. “나 또한 심히 우려하는 바요.” 사자를 나누어 파견해 군국을 순행하게 해 질병이나 어려움을 살피고 고아와 노인 같이 자립할 수 없는 사람은 곡식과 옷감을 차등을 두어 나눠주게 했다.

발이 즉위한 지 11년 되던 해, 이때가 원희元熙원년(419)으로 그 이후의 일은 송나라에 해당한다. 원가元嘉7년(430) 죽었다. 동생 풍홍弘이 발의 아들 익翼을 죽이고 자립했으나 뒤에 위魏의 공격을 받아 동쪽 고구려로 달아났으나 2년만에 고구려에서 살해당했다.

처음 풍발이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20년에 즉위하여 홍까지 2대에 걸쳐 28년을 이어갔다.

晉書 卷125 馮跋, pp.3129~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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