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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전위의 고창 차거안주 조상비 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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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전위의 고창 차거안주 조상비 발

자불어 2024. 1. 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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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대차거안주조상비는 1903년 독일 조사단에 의해 독일로 반출되어 베를린박물관이 소장했다. 아래 글은 뤄전위가 청말 정치가이자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단방端方(1861~1911)이 유럽에 시찰 갔을 때 구해온 탁본을 고증한 글이다. 서구열강 및 일본에 의해 투루판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중국 역사 기록에는 몇 페이지에 불과했던 고창국 역사가 밝혀지기 시작했고, 뤄전위 또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저거안주조사비

양왕대차거안주조상수사비발 涼王大且渠安周造象脩寺碑跋

이 비석은 근년 신강에서 출토되어 지금 독일수도박물원(베를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서 을사년 상서上書 단오교端午橋(端方)가 태서로 정치를 시찰하러 갔을 때 탁본 한 매를 떠서 가져왔다. 비는 양왕凉王 대차거안주大且車安周가 불상을 조성한 사실을 기록했는데, 중서낭중中書郎中 하후□하후□이 찬해 기 이름을 새겨놓았다. 안주는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아들이자 무건의 동생으로 그 사적은 위서魏書와 송서宋書에 기록되어 있다. 처음엔 악도태수樂都太守였으나 무건의 군대가 패배하자 태연5년(439) 토욕혼吐谷渾으로 달아났다.[위서魏書 세조기世祖紀] 세조가 그를 토벌하자 형 무휘와 함께 진창晉昌으로 달아났다. 진군眞君(440~451) 초, 무휘가 다시 주천酒泉을 함락했다. 2년 조서를 내려 무휘를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양주목涼州牧, 주천공酒泉公에 배수했다. 그러나 또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토벌해 주천을 빼앗으니 무휘는 결국 사막을 건너가고자 서쪽으로 가 선선鄯善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3년 선선의 세자가 안주를 따르자 무휘가 안주를 남겨두고 선선으로 가서 직접 고창高昌 공격해 빼앗고 고창에 머물렀다.[<위서 저거몽손전沮渠蒙遜傳>] 다시 거사車師를 격파하고[<위서 거사전車師傳>] 송에 조공했다.[<송서宋書 저거몽손전沮渠蒙遜傳]. 진군5년(444) 무휘가 병으로 죽자 안주가 대를 이어 즉위했다. 송은 안주에게 양주자사涼州刺史 하서왕河西王[<송서 저거몽손전>]을 수여했다. 화평원년和平元年(460) 연연蠕蠕에게 병탄되었다. 송서와 위서 양전에는 모두 안주가 나라를 잃은 연월을 기록하지 않았다. [위서 고창전과 송서는 안주가 몇 년 몇 월에 나라를 잃었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위서 고창전>, <송서>는 안주가 대명3년 방물을 바쳤고 이듬해 나라를 잃었다고 했다.] 이것이 살펴볼 수 있는 안주의 사적이다.

비석 말미에는 ‘□平三年歲次大梁(□평삼년세차대량)’이라고 했다. 연호 상 한 글자는 이미 닳아 없어졌는데, 대략 ‘承(승)’자 일 것이다. 최근 토욕구土峪溝에서 나온 <불설보살장경佛說菩薩藏經> 말미에 ‘涼王大且渠安周所供養經(양왕대차거안주소공양경), 承平十五年歲在丁酉書吏樊濟寫(승평십오년세재정유서리번제사)’라고 했고 또한 사경 잔본에 ‘歲在己丑(서재기축), 涼王大且渠安周所供養經(대차거안주소공양경)’이라고 했다. 승평15년은 정유로 3년은 을유로 비와 부합한다. 사경 잔본의 기축은 승평7년이다. 비석의 ‘□平’은 ‘承平’임에 틀림없다. 승평 원년은 북위 태평진군 4년으로 그 이듬해 여름 무휘가 죽고 안주가 대를 이어 즉위했다. 승평3년은 안주가 물려받고 그 이듬해다. 승평은 무휘의 연호로 안주는 이를 물려받았다. 송서와 위서에는 무휘의 연호가 나오지 않으니 비석과 경권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비석에는 이체자(別字)가 많이 나오는 데, 興(흥)은 1, 豈(개)는 2, 顧(고)는 3, 夜(야)는 4, 邊(변)은 5, 攝(섭)은 6, 斷(단)은 7, 惕(척)은 8, 猷(유)는 9, 雖(수)는 10 또는 11, 庶幾(서기)는 12/13, 旅(려)는 14, 飛(비)는 15, 惡(악)은 16, 身(신)은 17, 觸(촉)은 18, 嗟(차)는 19, 巘(언)은 20, 乾(건)은 21, 龍(룡)은 22, 就(취)는 23, 齊(제)는 24로 육조 석각에서는 보지 못했던 바다. 서체가 바르고 강건하며 해서와 예서의 중간으로 <찬보자爨寶子>와 <숭고령묘비嵩高靈廟碑>와 상당히 유사하다. 진우晉魏 사이의 고각은 매우 희귀한데 무척 귀한 보물이라 하겠다.

정미(1907) 초하初夏(음력 4월), 내가 안휘성 남부로 학정을 살피러 갔을 때, 도중 금릉金陵(난징)으로 나와 도재상서匋齋尙書를 따라가 빌려 보고 그 글을 교록校録하고 약간의 고증을 덧붙여 옛것을 좋아하는 국내 분들(海內好古者)에게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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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碑近年新疆出土, 今藏德都博物院. 光緒乙巳端午橋尙書觀政泰西, 拓一紙以歸. 碑述涼王大且渠安周造象事, 中書郎中夏侯□撰, 其名已泐. 安周爲沮渠蒙遜之子, 茂犍之弟, 其事迹散見 魏、宋兩書中. 初爲樂都太守, 茂犍兵敗, 以太延五年奔吐谷渾.[<魏書·世祖紀>]. 世祖討之, 與其 兄無諱奔晉昌. 真君初, 無諱復陷酒泉. 二年, 詔拜無諱征南大將軍涼州牧酒泉公. 已而復叛, 再加討, 克酒泉, 無諱遂謀度流沙, 西擊鄯善, 不克. 三年, 鄯善世子從安周, 無諱留安周往鄯善, 自攻高昌克之, 乃留高昌,[<魏書 沮渠蒙遜傳>] 復破車師[<魏書 車師傳>], 朝貢於宋[<宋書 沮渠蒙遜傳]. 眞君五年夏, 無諱病死, 安周代立. 宋授安周涼州刺史河西王[<宋書 蒙遜傳>]. 和平元年爲蠕蠕所并. 宋魏兩傳均不載安周失國年月, 此據<魏書 高昌傳>, <宋書>記安周於大明三年尙貢方物, 次年即失國矣. 此安周事實之可考見者.

碑末署「□平三年歲次大梁」. 年號上一字已泐, 約略似承字. 近土峪溝所出<佛說菩薩藏經>末署「涼王大且渠安周所供養經, 承平十五年歲在丁酉書吏樊濟寫」, 又有殘寫經, 末署「歲在己丑, 涼王大且渠安周所供養經」, 考承平十五年爲丁酉, 則三年爲乙酉, 與碑正合. 别卷之己丑, 則承平七年也. 碑之「□平」確為承平. 承平之元年當魏太平真君四年, 其明年夏無諱死, 安周代立. 承平三年乃安周襲位之次年. 承平爲無諱紀元, 安周仍之也. 宋魏兩書不載無諱紀元, 舍碑及經卷, 末由知之矣. 碑中别字最多, 興作1, 豈作2, 顧作3, 夜作4, 邊作5, 攝作6, 斷作7, 惕作8, 猷作9, 雖作10・11, 庶幾作12/13, 旅作14, 飛作15, 惡作16, 身作17, 觸作18, 嗟作19, 巘作20, 乾作21, 龍作22, 就作23, 齊作24, 有六朝石刻所未經見者. 書體方勁, 在楷隸之間, 與<爨寶子>及<嵩高靈廟碑>正相似. 晉魏間古刻至罕, 可寶甚矣.

丁未初夏, 予視學江皖, 道出金陵, 從匋齋尙書假觀, 既校録其文, 並略加考證, 以告海内好古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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