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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경교유행중국비, 그리고 뤄전위의 고증

자불어 2024. 1. 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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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는 기독교의 지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동시대 동서양 문화교류와 당대 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학력고사 사회탐구부터 각종 세계문화사 시험까지 종종 출제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출신 선교사 이사伊斯(Yazdhozid)가 당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2년 2월(太蔟月) 7일 대진사 경내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조의랑朝議郎 전행태주사참군前行台州司參軍 여수암呂秀岩이 정관연간 대진사大秦寺 승려 경정景淨의 서술을 적었다. 비의 높이는 197cm, 아래 귀부가 있어 전체 높이는 279cm다. 비신의 너비는 위가 92.5dm, 아래가 102cm이다. 정면에 ‘大秦景教流行中國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송문이 적혀 있다. 비신에는 해서로 32행, 행당 62자로 총 1780자 한자와 수백 여자의 시리아 문자를 새겼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탁본


이 비석이 다시 발견된 것은 명대로 희종熹宗 천계天啟3년(1623) 또는 천계5년(1625) 두 설이 있다. 엠마뉴엘 디아스(Emmanuel Diaz, Junior, 1574~1659, 陽瑪諾)는 당경교비송정전唐景教碑頌正詮에서 1623년으로 적었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알바로 세메도(Alvaro Semedo, 魯德照)는 비석을 실견한 첫 유럽인으로 중국사(The History of China)에 출토 정황을 남겼다. 니콜라스 트리골트(Nicolas Trigault)가 라틴어로 번역한 이래 1628년 불어판이 나왔고 이후 포루투갈어, 이탈리아어로도 번역되는 등 총 8종의 번역본이 나왔다. 혹여 이 비가 도난당할까 두려워했던 지역 당국은 비석을 금승사金勝寺 경내로 옮겨 승려에게 관리를 맡겼다. 청清 함풍咸豐 9년(1859) 무림武林 한태화韓泰華가 다시 비각을 지었으나 회교도 반란으로 사찰이 소실되면서 비석은 다시 방치되었다. 당시 서구 학자들은 이 중요한 비석을 서구로 옮겨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1년 유럽 모 공사관은 총리아문總理衙門에 이 비석의 보호를 요구했고 총리아문은 100량의 은자를 내려보냈으나 이 돈이 섬서에 도착했을 때는 5량 밖에 남지 않아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었다. 

1907년 덴마크 학자인 프리츠 홀름(Frits Holm)은 이 비석을 유럽으로 반출할 계획을 갖고 자금을 확보해 서안에 도착했으나 섬서순무陝西巡撫 조홍훈曹鴻勛이 제지하고 비석을 비림으로 옮겼다. 한편 섬서학당교무장陝西學堂教務長 왕헌군王獻君에게 프리츠와 협상하게 했고 결국 프리츠는 복제품 받기로 하고 반출을 철회했다. 프리츠는 청에서 제작한 복제품을 뉴욕으로 보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판매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메트로폴리탄에 보관되어 있던 복제품은 결국 1917년 뉴욕의 부호였던 조지 리어리(George Leary) 부인이 구입해 로마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하는 뤄전위의 고증이다. 

비림으로 옮기기 전 비석의 상황


경교유[행]중국비발 景敎流[行]中國碑跋 

이 비석은 서교西敎가 중국역사로 들어온 이래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옛 사람들은 경교景敎가 기독교라는 것을 몰라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인줄 알았으며 서양인이 지은 <경교비고景教碑考> 역시 비 중에 나오는 전교사 경정景淨이 누구인지 몰랐다. <정원신정석교일목록貞元新定釋教一目録>을 살펴보면 경정의 원래 이름은 아담스(亞當司)로 그의 사적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다.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이 비석으로 입증된다. 그러나 언제 사라져 가르침이 끊겼는지는 역사 기록으로 증험할 수 없다. 오직 <당회요唐會要> 권47에 회창6년 8월 불교를 폐하고 대진大秦 목요穆祅 2만여 명도 아울러 핍박 받고 해체되었다고 했다. 경교가 당대唐代 경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는 것은 회창 폐불 때문이다.

이 비석은 과거 서안의 금승사金勝寺에 있었으나 광서-선통연간 구미인이 모조품을 새겨 진품과 바꿔치기 하려 했던 것을 내가 학부의 관리로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당시 문락文恪 영경榮慶 공(1859~1917)이 학부상서로 있을 때로 문락 공에게 청해 섬서총독에게 전보를 보내 비석을 비림碑林으로 들이게 함으로써 서양인은 모조품을 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이 비가 간직한 사실로 덧붙여 기록해 둔다.

此碑爲西教傳入中國歷史之最古者, 前人不知景教爲基督教, 誤謂為火教, 即西人所撰<景教碑考>亦未能定碑中所述傳教師景淨爲何人. 考<貞元新定釋教一目録>, 載景淨原名亞當司, 紀其事實頗詳. 景教之入中國, 此碑可爲證據. 然何時廢而不行, 則史籍無徵. 惟<唐會要>卷四十七載會昌六年八月, 廢佛教, 制大秦穆祅二萬餘人, 並遭斥罷. 是景教之不得逞於唐代, 由於會昌之黜佛 教也.

此石舊在西安之金勝寺, 光宣間歐人有謀刻贋石易眞石者. 予備官學部, 聞其事, 時榮文恪公慶爲學部尙書, 乃請文恪電陝督移此石入碑林, 西人不得已載贋石以去. 此又此碑一故實, 爰附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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