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당나라 관리 주자사, 신라에 오다 본문
신라와 당은 오랜 시간 사절을 주고받았다. 당시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바다를 건너오다 사고를 당한 사신 이야기도 나온다. 당나라 사신 가운데 처음 이름을 올린 사람이 주자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48년(626) 가을 7월에 당唐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당 고조高祖가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고구려와 서로 화친할 것을 권유하는 조서를 내렸다."
당나라 사신들의 이름은 종종 언급되나 구당서나 신당서 열전에 입전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주자사는 유학전儒學傳에 실려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대 그의 학문이나 글솜씨가 인정받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의 열전을 옮겨 본다. (*밑줄은 번역에 자신 없는 부분이니, 언제든지 댓글로 질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앞의 삼국사기에서는 당 고조가 보냈다고 했으나 열전에는 태종이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 626년 현무문玄武門의 변이 발발, 이세민(당시 진왕, 훗날 태종)이 형제들(형 태자 이건성, 동생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현무문의 변은 626년 7월 2일(이하 태양태음력 기준) 일어났고 고종은 이세민을 7월 5일 황태자로 삼았다. 이세민은 아버지 고조로부터 양위받아 이해 9월 4일 황제가 되었다. 아마도 주자사는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7월 중순이나 하순에 대권을 행사하며 보냈던 듯싶다. 당시로서는 무덕9년이었으나 이세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또 이내 황제가 된 시기였기에, 무엇보다 주자사가 그의 명을 듣고 떠났기에 구당서의 찬자도 '정관 초'로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사는 꽤 재밌는 인물이었던 듯싶다. 지식도 출중하고 글도 잘 짓는 데다 놀기도 잘했던 듯.(친구 가운데 꼭 이런 사람 하나씩은 꼭 있다.) 춘추좌전을 강설하고 미녀를 받았다는 대목에선, 참... 그럼 아래로,
주자사朱子奢는 소주蘇州 오인吳人이다. 어려서 같은 마을의 고표顧彪에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배우고 후에 역사책과 문집을 두루 보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수隋 대업大業연간(605~618) 비서학사祕書學士가 되었으나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는 두복위杜伏威에게 붙었다. 무덕武德4년(621) 두복위를 따라 입조해 국자조교國子助教에 제수되었다. 정관貞觀 초 고려高麗・백제百濟가 함께 신라新羅 공격해 수년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고하자 이에 임시로 주자사를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의 직함을 주고 사신으로 충원했다. 가르침으로 세 나라의 원한을 풀어주고 의관이 훌륭하여 동이東夷에게 큰 존경을 받아 세 나라 모두 표를 올려 사죄하고 많은 선물을 주었다. 주자사가 사행을 가기에 앞서 태종이 말했다. “동이는 학문을 몹시 중히 여기는데 경이 대국의 사신이 되었으니 사례(束脩)를 받고서 그들에게 강설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리 해주시면 중서사인(벼슬)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외다.” 주자사가 그 나라에 도착해 이민족의 기대에 맞춰주고자 춘추좌전을 주제로 강설하고 미녀도 선물로 받았다. 사행에서 돌아오자 태종이 자신의 뜻을 어긴 것을 책망하였으나 그 재주가 아까와 물리치지는 못하고 산관散官으로 국자학國子學에 배치했다. (후에) 간의대부諫議大夫・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가 되었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학사學士가 되었다. 자사는 풍류가 있고 도량이 넓으며 꽤 유쾌한 사람이다. 또 문의文義로 도움을 주면 자주 연회로 보답을 받았는데 더러는 앞에서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정관)15년(641)에 죽었다.
朱子奢, 蘇州吳人也. 少從鄉人顧彪習春秋左氏傳, 後博觀子史, 善屬文. 隋大業中, 直祕書學士. 及天下大亂, 辭職歸鄉里, 尋附于杜伏威. 武德四年, 隨伏威入朝, 授國子助教. 貞觀初, 高麗・百濟同伐新羅, 連兵數年不解, 新羅遣使告急. 乃假子奢員外散騎侍郎充使, 喻可以釋三國之憾, 雅有儀觀, 東夷大欽敬之, 三國王皆上表謝罪, 賜遣甚厚. 初, 子奢之出使也, 太宗謂曰:「海夷頗重學問, 卿爲大國使, 必勿藉其束脩, 爲之講說. 使還稱旨, 當以中書舍人待卿. 」子奢至其國, 欲悅夷虜之情, 遂爲發春秋左傳題, 又納其美女之贈. 使還, 太宗責其違旨, 猶惜其才, 不至深譴, 令散官直國子學. 轉諫議大夫・弘文館學士, 遷國子司業, 仍爲學士. 子奢風流蘊藉, 頗滑稽, 又輔之以文義, 由是數蒙宴遇, 或使論難於前. 十五年卒.
舊唐書 卷189上 儒學上(朱子奢), p.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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