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문화재를 훔치는 자, 죽음에 처한다. 본문
2004년 8월 13일 하북성河北省 승덕시承德市 중급인민법원은 피고 이해도李海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해도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승덕시 문물국 외팔묘外八廟 관리처 문보부 부주임, 피서산장박물관避暑山莊博物館 부관장 등 역임하며 건륭분채묘금무량수좌상 乾隆粉彩描金無量壽坐像, 紫金嵌松石無量壽佛 등 소장품 259건을 빼돌리고 그중 152건을 팔아치워 72,000 달러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그는 진품 대신 짝퉁을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오랫동안 범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2심 재판부 역시 형을 확정, 2010년 11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문화재 절도가 사람의 인명을 빼앗아야 할 정도로 중범죄일까? 다른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렇다. 인민의 공분을 쌓는 반국가적 행위, 중국은 이런 행동을 가차 없이 처벌한다. 중국에서 형벌은 일종의 쇼케이스다. 혹독한 형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각심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복수나 정의구현의 쾌감을 준다. 다음 국공내전 시기 도굴범 이야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재 범죄 행형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역시 하북성, 역시 청의 유산. 준화遵和 청동릉淸東陵이 그 무대다. 청동릉은 청의 다섯 황제, 즉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건륭제乾隆帝, 함풍제咸豐帝, 동치제同治帝와 황후, 비빈, 황자, 공주의 무덤이 모여있는 청 황실의 공동묘지다. 1945년 가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대륙을 둘러싼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이 펼쳐지기 직전, 북경을 둘러싸고 있던 하북 일대는 중국공산당 치하였으나 국민당 특무, 비적 등이 횡행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왕소의王紹義는 마적 두목 마복전馬福田의 수하로 활동하며 일찍부터 이곳에서 청 황실의 무덤을 털었다. 그러나 민국 정부의 손전영孫殿英에 쫓겨 동릉 근처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약 10여 년간 솜을 털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차,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다. 당시 무덤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청의 후손은 만주국의 몰락과 함께 자신도 돌보기 힘들었고, 예전 정부가 지정했던 무덤 관리인들 역시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해 자신의 생업이 우선이었다.
이런 현실에 왕소의는 더 늙기 전에 한몫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조직 결성에 들어갔다. 먼저 함께 무덤으로 들어갈 토비 출신 경찰 양씨楊氏, 그리고 밖에서 망을 볼 민병 가씨賈氏를 포섭했다. 여기에 길잡이가 될 관씨關氏가 합류했다. 그는 무덤지기의 후손인 데다 무덤을 만들 때 일했던 친척으로부터 내부 구조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일꾼 20~30명을 고용했다.
첫 번째 대상은 함풍제와 효덕현황후孝德顯皇后 살극달薩克達 씨의 무덤인 정릉定陵이었다. 정릉은 부지도 넓은 데다 인적도 드물어 도굴을 개시하기 적당했다. 일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덤을 파 내려갔다. 왕소의는 두꺼운 강철로 만능열쇠를 만들어 함풍제와 효덕현황후의 관을 열어 관 안팎의 여러 보물을 죄다 훔쳤다. 그리고 약속대로 도굴품을 나눠 가졌다.
첫 대상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다음 대상을 물색했다. 두 번째 목표는 정동릉定東陵이었다. 정동릉은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西太后)와 자안태후慈安太后의 무덤이다. 자희태후릉은 이미 손전영에게 도굴된 적이 있었는데, 타이완 고궁박물원의 유명한 비취옥 배추는 이때 나온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앞서 함풍제의 무덤은 직접 제작한 만능열쇠로 열었지만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다. 왕소의 일당은 다이너마이트를 쓰기로 결심했다. 혹여 폭발음이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며칠 전부터 산에서 돌을 굴려 떨어뜨려 지진이나 산사태로 보이게 했다. 이번에도 역시 성공이었다.
이즈음 그는 튼튼한 뒷배를 얻었다. 인민해방군 고위간부 장씨張氏를 끌어들였다. 장씨는 일본 탄광 광부 출신으로 지하당 활동을 하며 입지를 굳혔던 사람이다. 장씨는 ‘황상皇上, 대지주와 투쟁', '군중의 기근 극복을 지원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현지 주민들에게 왕소의의 도굴을 돕도록 하는 한편 구장區長 개씨介氏에게 독려하라고 지시했다.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순식간에 대규모 도굴이 전개되었다. 사람들은 각기 공정에 따라 분업하고 등급을 매겨 장물을 나눠 가졌다. 그 뒤 몇 달간 정릉과 정동릉 사이 5기의 황비릉은 하나도 무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의 효동릉孝東陵도 도굴했다.
청동릉에서 공산당의 비호 아래 도굴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은 국민당 치하까지 들어갔다. 언론도 공산당 정부가 황릉의 보물을 빼돌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국공간 경쟁 상황에서 도굴은 공산당 정부에 흠집을 내는 행위였다. 이에 공산당 중앙은 바로 주범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미 일부는 소식을 듣고 잠적했다. 왕소의는 6년 뒤 준화와 계현薊縣 경계에서 붙잡혔다. 왕소의와 그 일당에게는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다. 형의 집행은 총살형이었는데, 형장은 강희제熙帝의 능침인 경릉慶陵의 대패루大牌樓 앞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집권 초기부터 이런 모습이었다. 유물론을 배우고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강희제의 능침에서 도굴범을 처형함으로써 영령들에게 사죄한다는 것이 넌센스지만, 이것이 바로 중화주의의 변종, 중국공산당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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