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남로당 이강국, 고유섭의 죽음을 애도하다 본문
현대일보 1946년 7월 12일자에 실린 기사다. 글을 쓴 이강국李康國(1906~1956?)은 양주 출신으로 1925년 보성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고유섭도 보성고등학교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함께 지낸 시간만큼이나 친분도 돈독했던 듯하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 중 공산주의 이론에 입문하고 1928년 중퇴해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철학과에 입학, 독일 공산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귀국 후 파업을 주동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 좌익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미군정 하에서 체포령이 떨어지자 월북했다.(이때 연인 김수임이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서 외무국장, 조선인민군병원장, 조쏘항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으나 1953년 종전 무렵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숙청,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강국의 고유섭 추도사를 읽으니, 또 이후 이곳에서 펼쳐진 역사를 보니 고유섭이 설령 광복 후까지 살았다 한들 그의 인생이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아 씁쓸하다.
일인일언一人一言
고유섭高裕燮군의 이주기二周忌
이강국李康國
외우畏友(존경하는 벗) 우현 고군이 유위有爲(능력있는)의 재능을 펴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된 지 어언 2년이 되었다. 지난 23일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 인천시민대회에 참석하였던 기회에 대회장에서 미망인을 만나 뵈어 비회悲懷(아픈 마음) 더욱 간절한 바 있더니 이제 군의 2주기를 맞게 되니 모앙하는 회포懷抱도 억제키 어려우려니와 해방의 환희를 나누지 못하고 건설의 고락을 같이하지 못하는 유한遺恨은 철천徹天(하늘에 사무친)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 2년 전 그때는 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사투가 ■■되어 민주주의의 승리가 거의 결정적으로 예단되든 때이었으므로 천하욕귀일이래정군하이사재天下欲歸一而來定君何以死哉(천하가 이제 하나 되어 안정될 때 그대는 어찌 죽었단 말인가)로 그 원한을 ■사에 표현한 바 있었거니와 조선에 해방의 봄의 돌아오고 민족문화의 건설이 과업으로 나타나고 (지워짐) 군이 생존하여 있었으면 하는 감회 더욱 통절한 바 있다. 군의 온축蘊蓄(깊이 쌓아둔 학식)과 포부가 바야흐로 발현될 수 있는 이때 신생 조선이 그 민족문화를 향상 발전시킴에 당하야 군의 활약을 요청하게 될 이때 군은 이미 유명幽冥(저승)에 속하고 있으니 이 어찌 우리의 유한遺恨이 아니며 조선의 불행이 아니랴?
군의 욕지辱知가 된 지 거의 30년, 중학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던 때로 추억의 실머리는 한 없이 풀린다. 교장 댁 식객으로 있는 군의 방을 동맹파공同盟罷工의 총본부로 삼고 략(작전)을 어린 머리에서 짜내던 그때에 우리의 친교는 그야말로 투쟁을 통하여 지기知己로 서로 허청許請하게 되었다. 군의 노력, 군의 다각적인 재능을 흠선欽羨하면서 수재에 끝없이 둔한 나는 ■화차작■畵借作을 몇 번이나 받았든가?
함께 빈한에 울면서 학비의 보장도 ■산■算도 없이 상급학교에의 진학이 막연한 채 동급생들의 입학시험준비도 대안의 화재인 듯 중학 졸업에서 우리 양인兩人(두 사람)만이 대학 예과로 덮어놓고 들어가게 된 것도 우연한 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에게 미학전공을 권고한 것도 나이었으니 불우에서 일생을 맞이한 게 책임을 느끼기도 ■는 것이다. 일련기생一蓮記生으로 학교를 마친 우리는 다 같이 상아탑을 동경하고 연구실 속을 찾아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손神孫(일본인)이 못되었던 죄과罪科로 서로 전후하야 나는 외국으로 군은 개성으로 떠났던 것이다. 한직에서 그날그날의 생계에 쪼들리면서 군의 연찬硏鑽은 깊고 넓어 조선미술사에 있어서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군의 장식 때나 작년 소상 때는 개성에서 또 김포에서 유족과 같이 군의 장서를 정리하고 유고를 출판할 것을 의론하고 계획하였다. 해방 이래 일련의 잡무에 쫓기고 있는 관계로 구실이나 설명은 될는지 모르나 군의 장서는 개성에 임치任置된 채 유고는 광저에 쌓인 채 남아있다. 심지어 소식도 끊긴 채 일전 인천대회장에 참석하였다가 1년 만에 의외로 미망인을 만나게 되니 이 어찌 친우로써 군에게 대한 도리이랴?
선천적으로 권세에 반항하는 성격, 후천적으로 수양된 민주주의 정신과 과학적 세계관, 풍부한 학식, 고결한 인격, 얼마나 신조선 건설에 특히 민주주의적인 민족문화 발전에 위대한 공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냐? 생각할수록 한만 깊어 간다. (필자 ~민전사무국장民戰事務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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