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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초등학교, 중군영, 청수관, 천연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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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초등학교, 중군영, 청수관, 천연정

자불어 2024. 2. 2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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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천연동의 금화초등학교 앞에는 3개의 표석이 있다. 하나는 중군영 터, 하나는 천연정 터, 하나는 청수관 터다. 표석 세 개만으로도 이곳에 많은 이야기가 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 개의 표석, 중군영, 천연정, 청수관

연못이 있던 자리

금화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본디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모화관 남쪽에  연못을 조성하라는 조선 태종의 지시에 따라 1408년에 판 것이다. 궁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지西池’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 외에도 남대문 밖의 남지南池, 동대문 밖의 동지東池가 있었는데, 모두 연꽃이 만발했다. 그래서 그 해 어느 연못의 연꽃이 활짝 피는가에 따라 정권의 향방이 달라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서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서인이, 남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남인이 득세했다는. 또 ‘반송지盤松池’라고도 했는데 그 곁에 나뭇가지가 넓게 퍼진 소나무가 있었서였다. 옛날 고려의 임금이 남경(서울)에 행차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니 그 아래서 쉬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또 ‘천연지天然池’라고도 했는데 이는 천연정天然亭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이름이 천연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지西池는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다. 가뭄이 크게 들 때 기도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연꽃을 심었다. ○ 옛날에는 못 가에 반송盤松이 있어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임금이 일찍이 남경南京(서울)에 행차하던 중 여기서 비를 피했다. 본조本朝(조선) 초기까지 소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반송지盤松池라고 했다. 태종太宗 8년에 모화관을 남지南池(필자주: 모화관 남쪽 연못이라는 뜻이다.)에 파는 데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니,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 못 서쪽 언덕 위에 경기도 중군영이 있다. 천연정天然亭을 지었으며 또 원관정(遠觀亭)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고전번역원 DB에서 일부 수정)]  

서지는 서울의 명소로 많은 문인들이 찾았다. 다산 정약용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정약용은 서지를 주제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아래 시는 천연정을 주제로 읊은 것이다.   

성벽 사이로 길게 난 서교 가는 길
더운 여름 따라가면 청량감 찾아,   
사방 트인 마루 기둥 벽촌을 여니
일군의 말 탄 이들 연못에 비친다.
활터엔 날 따스해 새싹은 푸릇하고
어망 사이 미풍에 연봉오리 향이 퍼진다.
살구 담그고 참외 띄워 웃고 즐기다가
늘상 해저물 녘 다되어야 들어갔지.
西郊馳道夾城長 / 朱夏追隨趁晩涼
四達軒楹開僻巷 / 一群鞍馬照芳塘
射臺日煖莎苗綠 / 魚檻風微菡萏香
沈李浮瓜欣笑傲 / 常時歸影逼斜陽
[다산시문집 권4 시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가운데(고전번역원 DB 일부 수정)]


하늘이 빚어낸 정자, 천연정

추사 김정희는 재종손을 대신하여 천연정 중수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천연정은 중군영 내 부속 건물로 이름은 이백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1793년 처음 지었으며 이후 조금씩 보수하다가 1836년 무렵에는 많이 낡았던 모양이다. 또한 천연정 앞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도 있었다.   

기보畿輔의 신영新營(중군영)에 정자가 있으니 천연정이라 이른다. 이 정자는 못으로써 이름났으며 못은 도성 근지에서 제일 크고 또 부용芙蓉(연꽃)이 많으므로 이백李白의 시구詩句인 “하늘이 빚어낸 것으로 조각하거나 장식하는 경지를 넘어섰다.[天然去雕飾]”에서 뜻을 따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중략)... 순안사巡按使가 빈료賓僚들을 이끌고 잔치놀이를 하자면 반드시 이 정에서 하며, 관개冠蓋가 화현華峴으로부터 왕래할 적에 경사대부卿士大夫들이 조장祖帳을 벌여 영접하고 전송할 적에도 반드시 이 정에서 한다. 심지어 주객酒客과 시인들은 무리를 나누고 대오를 벌여 기승奇勝을 각축하며 홍의紅衣를 걷어잡아 읊조림을 의탁하고 옥퉁소를 끌어당겨 술을 마시면서 그 사이에 박부拍浮하여 실컷 노닐고 즐기어 태평세월을 뽐내고 자랑하는 것도 반드시 이 정에서 한다. 이 까닭에 정의 승경은 더욱 드러나 있는 것이다. 정자는 정종正宗(정조) 계축년에 창건되어 사십여 년 사이 틈틈이 수리하여 없어지진 않았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둥은 기울고 초석은 함몰되었으며 연못은 메워져 황폐해졌다. 또한 그 자리로 차고 들어와 노점을 차리니 눈 한 가득 쇠락한 모습에 지나가는 이들마다 마음 아파하며 탄식한다. 내가 부임하여 기보를 다스린 이듬해 병신丙申에 재목을 모으고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비로소 경영에 착수했는데 정실亭室의 위치는 하나도 더 늘린 바 없고 못을 파서 일천경一千頃을 만들어 다 이전 경계대로 돌려놓음과 동시에 제방을 빙 둘러 버드나무를 심었다. 무릇 재정은 천여 금을 들이고 역부는 이천 명을 사용하여 사월에 시작해서 유월에 가서야 공역工役이 완성되었으니 대개 정자나 못은 예전 규모로 복구하되 옛 경관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을 뿐이다. ...(중략)... 정자 아래 기우祈雨의 제단이 있어 지금 비록 황폐하였으나 또 대략만 수축修築하였으니 이 역시 옛 모습을 폐없애는 일 없도록 하였을 따름이다. 아울러 기록한다.
[완당전집 권6 기(記) “천연정 중수기(天然亭重修記) 재종형을 대신하여 짓다.” (고전번역원 DB에서 일부 수정)]


중군영의 청수관, 일본공사관이 되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공사관이 중군영에 자리 잡았다. 조선 정부는 일본 공사의 숙소로 청수관 淸水館 을 내주었다. 이에 1879년 4월 24일(음)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을 데리고 들어와 이곳에 자리 잡았고, 1880년 일본이 경성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이곳이 곧 영사관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구식군대가 봉기하자 별기군을 제안했던 일본공사관은 표적이 되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탈출했으나 공사관은 불타고 별기군 교관으로 와있던 일본군 장교를 포함해 공사관 고용원 14명이 죽었다. 청의 발빠른 개입으로 사태가 수습되자 하나부사도 일본군을 앞세워 복귀했다. 이때 일본군 지휘관이 훗날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다. 조선 정부는 임오군란의 후속 처리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각종 명목으로 배상금을 뜯어냈고 서울에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도 얻었다.(주둔 비용은 조선 부담) 당시 사망했던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으며, 그때 공사관에 걸려있던 일장기는 야스쿠니 신사 부속 전시관인 유슈칸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로 이곳은 국권피탈 과정의 역사적 장소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청수관은 하나부사 등 공사관 직원들이 달아날 때 불태웠다고 한다.(침입자들이 불지른 게 아니다.)  당시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탈출했던 고토(近藤) 서기관 수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오카 효이치(岡兵一, 이등경부二等警部)와 아오야마 겐조(淸山顯三, 칠등속관)이 일본 국기를 들고 선두에 서고 치하라(千原, 육군중사), 미지마(水島, 고용원)를 후미로 하여 돌격, 탈출대열을 정비한 다음 공관에 방화하고 국기와 칼을 휘두르며 정문을 빠져나왔던 것이다.”(조선일보 1978.6.8. 이설한국사 참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본공사관 터인 이곳을 사적으로 정했다.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이곳에 한옥이 있는데, 어디서는 천연정, 어디서는 청수관이라고 하나 청수관은 본디 일본공사관 본관 건물로 임오군란 시 이미 불타버려 없어졌고 여기서 청수관이라 함은 청수관 터에 남은 건물이라는 뜻으로 사실 천연정을 말하는 것이다.

천연정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건판028556)

연못을 메우고 지은 축첨공립보통학교(현 금화초등학교)

금화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죽첨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 초)에 있다고 하여 그리 지은 것으로 1883년 하나부사 후임으로 온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2~1917)를 기념해 지은 것이다. 죽첨정은 현재의 충정로로 죽첨공립보통학교는 본디 오늘날 적십자병원 구역 안에 있었다. 그러나 병원을 확장하면서 현재의 장소, 당시 명칭 천연정天然町으로 이전했다. 

매립 전 서지西池, 멀리 천연정이 보인다.(경성일보 1927.9.10.)

매립되는 금화산록金華山麓의 연지蓮池
유서 깊은 경성의 명소로 죽첨보교竹添普校를 이전
경성부 북부 금화산록에 2천평에 달하는 연지는 경성의 명소이자 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지가 조만간 매립된다 한다. 적십자병원이 의학전문학교부속병원으로 이관됨에 따라 동 병원의 확장으로 인접 죽첨보통학교는 자리를 내줘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동교는 교사도 오래되고 설비도 이전할 수 없어 앞서 개축 이전이 논의하는데 경성부에서도 퇴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찬성으로 이전 장소를 사려고 알아보려던 중 적당한 장소가 없나 찾아본 끝에 독립문 안의 연지를 매립해 여기에 동교를 신축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학교비로는 연도 예산에 신축비를 계상한다고 한다. 연지의 연못가에는 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가 여기에 있다가 메이지 17년(1884)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공사는 마포로 피신해 그곳부터 돛배를 타고 인천으로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는 이력이 있는 땅으로 하나부사 공사가 살던 연못가의 온돌(オンドル) 은 아직 남아 있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또한 연지는 예로부터 조선에서 유명한 명소로 연못가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아취 있는 정자(다정茶亭)가 있어 시인은 달 밝은 밤 연꽃에 시흥을 돋우던 곳인데 이곳이 매립되면 연지도 이제 옛날이야기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온돌만은 영구히 남아 역사를 말해줄 것으로 내년까지는 연지가 경성학교비로 양도 인가될 것이다. [경성일보 1927년 9월 10일자]


천연정은 일제강점기에도 사적으로 유지 되어왔던 듯한데,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전쟁 통에 소실된 건 아닌가 싶다. 또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공사관 부속 건물로 소개했으니 광복 후 없어졌다고 해도 당시로서는 어떤 아쉬움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곳에 걸려 있었을 추사의 중수기를 생각하노라면... 아마 누구의 손에라도 남아있었으면 참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 전설 하나, 금화초등학교는 연못을 메우고 세운 학교라 소풍 날마다 비가 내린다고 한다.  
*금화초등학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초등학교입니다. 학생 여러분, 학부모님들 자부심을 가지세요!!!

서울 금화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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