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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왕자 이우 공, 친일 행사를 주최하다

자불어 2024. 4. 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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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황족 친목회는 이우李鍝 공 전하의 주최로 26일 오후 3시부터 시부야 도키와마츠(常盤松)의 어전에서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를 필두로 각 황족 분들이 모여 해군종군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를 초청해 “전장의 흙먼지를 줍다”는 제목으로 소강부대遡江部隊의 활약 관전담을 약 1시간에 걸쳐 청취, 마치고 다과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5시에 산회했다. (사진은 요시카와 에이지 씨)[경성일보 1938.11.27.]


이날 행사의 강연자인 요시카와 에이지는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통속소설 작가로 삼국지, 미야모토 무사시 등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이야기했다는 소강부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대'를 뜻하는 것으로 양자강, 즉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해군 부대를 말한다. 당시 일본은 중화민국을 파죽지세로 짓밟았다. 화북의 주요 도시는 물론 국제도시 상해,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함락했다. (남경을 점령한 뒤 일본은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중화민국은 수도를 중경(중칭)으로 옮겨 저항을 이어갔다. 소강부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중경으로 진격했던 부대를 말한다. 이날의 행사는 일본이 중국에서 거둔 군사적 성공을 실감나게(?) 들려주는 행사였을 것이다. 

소강부대 / 일본 해군 종군화가 미쿠니 히사시(三國久, 1885~1966) 그림

이날의 행사를 마련한 사람은 대한제국 황실가문의 대표적 훈남으로 꼽히는 이우李鍝(1912~1945)다. 그는 본디 대한제국 의친왕,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의 차남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李埈鎔 사후, 양자로 입적되어 그 뒤를 이었다. 양아버지 이준용은 대한제국 시대 황실 일원의 대표 친일파로서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신궁봉경회란, 한국이 국조 단군과 일본의 건국신建國神 아마테라스가 본디 남매였다고 주장, 대한제국에 신궁神宮 건립을 주도했던 단체다. 통감부는 국권 피탈 직전 이런 경거망동하는 친일파를 대대적으로 검속했는데(혹여 민란의 트리거가 될까 두려워서), 이때 회장 김재순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입건하자 자연 해산되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마지막까지 신궁을 건립하려고 했던 곳이 북관왕묘北關王廟였다는 것. 북관왕묘는 옛 보성중고(현 서울과학고) 자리에 ‘근대’ 군주 고종 명성황후 무당 진령군眞靈君을 위해 지어준 사당이었으니, 이 역시 묘한 인연이라 하겠다. 여하튼 대한제국 황실 일원이 독립운동했다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주장을 펼쳤던 단체다.


이우 공이 일본에 반감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광복 이후의 구전으로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위 행사는 이우 공 자신이 직접 주최한 행사로 왜 저런 행사를 열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우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아있는 사진에서 이우는 시쳇말로 '훈남', '꽃미남'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한제국이 안 망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입헌군주국을 상상했던 많은 드라마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렇게 잘생긴 훈남이 친일파일리 없어", 또는 "혹여 독립운동도 했을지 몰라"라는 희망에 더러 대중문화에선 독립운동가로 변모시키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인과의 혼인을 강요받았는데,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점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조선인은 이완용과 친일을 경쟁했던 박영효朴泳孝 후작의 손녀였다. 따라서 그가 싫었던 건 인종적 일본인이지 조선의 독립 뭐 이런 거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혼인을 고집했던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왕가 가족 남성들이 그랬듯 일본 육사에 진학해 황군 장교로의 길을 걷는다. 중일전쟁이 한 창이던 1940년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1941년 조선군사령부로 배속되었다. 1944년 3월에는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북지나방면군 제1사령부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이 때 반일 유격대를 지원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도 논리도 없는 허언에 불과하다.(고종 가족들의 독립의식 또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입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히로시마의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8일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이와 같은 안타까운 죽음 역시 실제 사실에 분칠 하는 동인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 픽션은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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