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 이강, 고종의 돈을 “착복하다” 본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려 했다 실패했다. 그래서 다른 대한제국 황실 가족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뇌피셜로 증거도 없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덧붙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또 증좌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퍼 나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망명 사건 이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은 이강뿐이다. 망명 실패 이후 그를 망명시키려 했던 인사들의 구명운동은커녕 일제강점기 내내 숨죽이고 살았다. 호기롭게 “내 뜻이오”라는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최소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고종의 뜻”이었다며 고종을 찬양하지만 자신이 보낸 밀사들의 삶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고종의 모습은 잘 모른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나라를 소유물 쯤으로 생각했다. 국권피탈로 백성은 나라를 잃었지만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권력과 백성을 잃었을 뿐 지위와 돈은 보전했다.
일제 앞에 굴하지 않았던 의친왕의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이방자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세월이여 왕조여”다. 그러나 이방자가 이야기한 “의친왕이 일생을 방탕하게 지낸” 것에 대해서는 모른척한다.
일생을 방탕하게 지낸
의왕 이강 공
의왕義王은 궁인 장씨의 몸에서 태어나 기구한 일생을 보낸 분이다. 장씨도 다른 후궁과 마찬가지로 민비를 상당히 무서워해서 임신을 하자 궁 밖 외삼촌 댁에 숨어지내며 의왕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의왕을 낳은 지 반년 만에 이 사실이 민비의 귀에 들어갔다. 민비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간 장씨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 다시 쫓겨났는데, 그후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일찍 생모를 잃은 의왕은 유모에게 맡겨진 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는 이 없이 궁중에서 외톨이로 자랐다. 민비가 별세한 후 20세나 아래인 영왕이 세자로 책봉됨으로써 의왕의 존재는 더욱 초라해졌다.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사랑이나 관심에서 소외된 채 자란 의왕이니 좌절과한이 쌓이고 성격이 비뜰어지거나 방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잘 생기고 호탕하고 영민한 의왕 이강 공이 일생을 방탕하게 지낸 것은 어려서부터 고독하고 소외된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향신문 1984.7.4.)
이방자는 의친왕이 “일생(잠깐이 아니다)을 방탕하게 지낸” 것은 어렸을 때 받은 냉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친왕은 당시에도 축첩과 주벽酒癖으로 유명했다. 이강이 의친왕 때부터 방탕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통감부 문서가 있다. 통감부는 국권피탈 전부터 대한제국 주요 인사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의친왕,
일본 고리대금 업자에게 빚지다
(483) 義和宮(의화궁)에 관한 件憲機第一三九九號(헌기제1399호) 一. 지난해 의친왕이 일본에 몸을 피하고 방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당시 돈(金員)이 궁해지자 도쿄(東京) 긴자(銀座) 2초메(丁目)의 하기하라 진키치(萩原甚吉)라는 자에게 부탁해 이 사람(同人)의 주선으로 사이타마 현(琦玉縣) 기타아타치 군(北足立郡) 가와구치초(川口町) 57번지 고리대업자 나가세 지로우에몬(永瀨次郞右衛門)으로부터 금 2만圓을 1905년 11월경 두 번에 걸쳐 차용하였다(이자는 월 5분分으로 이 이자의 반액은 주선자 하기하라萩原에게 지급하는 약속이었다고 함). 그리고 1906년 봄에 의화궁義和宮이 일본에서 귀국하자 의친왕(동궁)은 고문顧問 사토 간(佐藤寬)과 함께 6만원의 부채가 있다고 일컫고 당시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등에게 곤궁함을 호소하여 동궁은 마침내 6만원을 태황제로부터 수령하였다고 한다. 一. 위와 같이 실제 부채는 2만여 원인데도 불구하고 6만원의 부채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아래와 같이 이를 착복하였다고 한다. 6만원 내역 2만 2,000원 나가세(永瀨)에게 원리금 반환 1만 7,000원 의화궁義和宮 9,000원 사토 간(佐藤寬) 5,000원 고구레 나오이치(小暮直市) (하기하라 진키치 대리로 당시 한국에 온 자) 1,000원 여러 잡비 一. 위 사토 등의 부정을 잘 알고 있는 하기하라 진키치는 당시 자신의 대리인이던 고구레 및 나가세 등에게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자신은 약속한 이자액조차 분배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불평을 품고, 그 후 본건에 관해 사토 등에게 교섭하는 바 있었지만 정리되지 않으므로 이 사람은 요즈음 그 내막을 일본 및 한국의 신문에 폭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부기付記 하기하라萩原은 금년 봄에 서울에 와서 중부中部 이동里洞에 임시 거처하고 있다고 한다. 위를 참고삼아 내보內報한다. 메이지(明治) 42년(1909) 7월 4일(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감부문서) |
문서번호에 ‘憲(헌)’자가 있는 것을 보면 헌병대에서 포착한 정보를 통감부로 보고한 내용으로 판단된다. 내용인즉슨,
1. 의친왕은 일본 망명 시절, 방탕한 생활로 고리대금 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2.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갚을 수 없게된 의친왕은 귀국 후 돌려주겠다고 했다.
3. 의친왕은 빚이 있다며 궁내부에 6만원을 요구했다.(실제 빚은 2만 2천원)
4. 고종은 궁내부를 통해 6만원을 내줬다.
5. 의친왕은 받은 돈으로 빚을 갚고 나머지 돈은 일본인 고문 등과 나눠먹었다.
의친왕, 부채가 더 있는 듯 꾸며
고종의 돈을 삥땅치다
의친왕은 순종 즉위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실각이었기에 한국에서도 생활비를 보내줬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넉넉하지 않았으나 그는 한국에서처럼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결국은 일본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의친왕이 귀국하자 고리대금업자도 돈을 받겠다며 한국까지 따라왔다. 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황족의 삶은 이랬다. 당시 의친왕이 삥땅친 6만원이 어느 정도의 거금이었을까? 비슷한 시기 일본 통감부가 필동소학교 교사를 일본 순사 교습소로 쓰겠다며 대한제국 학부에 건내려 했던 돈이 5천원이었다. 이방자는 의친왕의 방탕한 생활을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이라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고 포장한다. 하지만 일제의 눈을 피하겠다고 고리대 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또 삥땅 치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의병 자금이지 않았을까라는 허언을 구사할 수도 있겠으나 일본인 공범들과 나눠 먹은 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로 자랑하는 황족이 이 정도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망국사亡國史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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