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팩트체크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본문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모 국회의원 후보자가 고종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구설에 올랐다. 후보자는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그래서 나라를 망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역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할 때는 근거 없이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고종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술국치 이후 고종이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자가 많고 옛 문투라 대충 고쳐보면 아래와 같다.

이태왕 전하의 근황(近狀)
이태왕 전하의 근황을 알아본(漏聞) 즉 매일 오전 10시경에 기침하시어 즉시 조찬을 받으시고 오후 2시경에 서양 요리를 받으시며 오후 7시 혹은 8시에 조선 요리를 받으시는 것이 상례라 하며 또 취침하시는 시각은 대개 오후 10시경이나 혹은 심야 3시까지 여관女官 등과 담화하시는 일도 있으셔서 유쾌히 세월을 보내신다더라.(매일신보 1910.12.3.)
이태왕이 된 고종은 늦은 밤까지 여관女官과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여관은 조선시대의 궁녀로 궁중 내 여성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품계가 주어져 정5품 상궁尙宮, 상의尙儀부터 종9품 주변치, 주치, 주우奏羽, 주변궁奏變宮이 있었으며 동궁관에는 별도로 종6품 수규守閨, 수칙守則부터 종9품 장장掌藏, 장식掌食, 장의掌醫 등이 있었다. 흔히 궁녀라고 하면 왕의 비빈을 떠올리나 대부분은 궁중 내 여러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여관과 늦은 밤 담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고종이 여성을 밝혔다거나 심야 파티를 즐겼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허위과장이며 악의적 비난일 수 있다.
고종이 여자를 밝혔는지는 모른다!
파티는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고종이 파티를 즐겼던 것만은 사실이다. 러일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즉위 40주년 파티를 위해 매진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 남아있는 칭경 40주년 기념비각은 원구단과 더불어 대한제국의 복고풍 허세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라 하겠다. 이런 태도는 국권피탈 뒤에도 계속 되었으니,
덕수궁의 초연(招宴: 연회 초대)
이번(這回) 귀족 관광단에 참가하여 일본에 갔던(도일度日했던) 각 귀족 부인에게 대해 덕수궁 이태왕 전하께서는 본일 오후 3시부터 오찬회를 여신다더라.(매일신보 1910.12.10.)
경술국치 후 귀족들(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은 부부 동반으로 일본에 관광을 다녀왔고, 이들이 돌아오자 고종은 그들의 부인을 초청해 오찬을 열었다. 그러나 이 연회는 낮에 개최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심야 파티와는 무관하다 하겠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종이) 1. 여자를 밝혔어. 2. 밤마다 파티를 했어. 3. 나라를 망쳤어." 에서 1번은 모름, 2번은 세모, 3번은 동그라미라 하겠다. 참고로 여자를 밝힌 황족은 그의 아들 가운데 있다.
여하튼 근거 없는 이야기는 단정적으로 하지 말자!
BUT 고종 역시 역사의 영역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될 수 없다.
1. 오락가락 하며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여러 신료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죄
2. 무당 진령군에 푹 빠져 국정을 문란케 한 죄
3. 1879년 광무 개혁 이후 실력 없이 권위 만들기에 몰두하고 권력을 백성과 나누지 않은 죄
4. 신료들은 망국을 책임지고 맞서 싸우고 목숨을 버렸거늘 당당히 맞서지도, 책임도 저버리고 일신의 안위를 누린 죄
*그나마 독립운동 했다고 하는 거, 신하들만 사지로 내몰았을 뿐. "내가 했다"하며 일본놈 따귀라도 한 번 후려 친 적 있던가?
등 공보다 과가 많은 인물이다. 고종이 여성을 밝혀 밤마다 파티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나라를 망친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 중 작위, 훈장, 은사금 거부한 자는 한 명도 없어.
나라를 빼앗겼기에 안타깝거나 동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종이 여성을 밝혀 밤마다 파티했다는 것이 역사일 수 없듯 고종과 그의 가족을 미화하는 것 역시 왜곡이다. 국권피탈 이후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나 명사 중 일부는 일제가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태왕, 이왕, 영친왕, 이희공, 이강공 등등, 흥선대원군 자손 가운데 일제가 격하시킨 왕공족 지위나 은사금을 거부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던가? (원래 황실 재산이라고? 나라를 빼앗겼는데... 그렇담 나라는 망했어도 지들 재산은 보전되어야 했단 말인가?) 아님 나라가 망했다고 목숨을 던진 이 있던가? 이건 해석이 아닌 팩트를 묻는 질문이다. 독살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한들, 대놓고 일본놈은 커녕 을사오적, 정미칠적도 후려갈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1919년 대동 단결 선언에는 “1910년 8월 29일 융희 황제가 주권을 표기하는 순간 그 주권은 우리 국민과 동지들이 돌려받은 것이다.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三寶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한 대통大統을 상속할 의무가 있다.”라고 했다. 이천 년 넘게 왕을 모시고 살았던 사람들이 나라가 망한 지 9년 만에 공화국을 선택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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